ADVERTISEMENT

대기업 11곳 구조조정 완료, 매각 무리수에 M&A 불발도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87호 14면

‘이동걸의 산은’ 4년 7개월 공과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온라인 기자 간담회를 열고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회장은 이날 사의를 표명했다. [사진 KDB산업은행]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온라인 기자 간담회를 열고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회장은 이날 사의를 표명했다. [사진 KDB산업은행]

한국은행처럼 정부가 특별법에 의해 설립한 은행(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이하 산은)이 오는 10일 새 정부 출범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통상 정권이 교체되면 국가의 새 경제 정책과 보폭·방향을 맞춰야 하는 국책은행 역시 조직에 변화를 주는 경우가 많다. 산은은 이미 수장인 이동걸 회장이 최근 사의를 밝힌 상태다. 2017년 9월 취임한 이 회장은 2020년 9월 산은 역사상 4번째로 연임에 성공하면서 지난 4년 7개월간 산은을 이끌었다. 이 회장은 2일 기자간담회에서 “(새) 정부와 정책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이 회장 직무를 수행하고 함께 평가받는 것이 순리”라고 사의를 표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원래 임기는 내년 9월까지다.

대우조선, EU서 합병 승인 불허

그동안 ‘이동걸의 산은’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정책금융 기능 즉, 채권단으로서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데 집중하면서 산업계 구원투수 역할을 자처했다. 산은에는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이나 상업금융 관련 기능도 있지만 이 회장의 산은에서 그런 존재감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서 “이 회장은 4년 7개월간 구조조정만 하다가 임기가 끝나게 됐는데 성과가 명확한가”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유다. 다른 한편에선 새 정부가 그간 이 회장의 산은이 보여준 공과(功過)를 되짚고, 개선점을 더한 청사진을 준비할 때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회장 주도로 산은이 구조조정을 마친 대기업은 금호타이어·대우건설·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현대상선(현 HMM) 등 11곳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의 공로로 평가되는 것은 고용 안정성 확보다. 기업 매각 때마다 노동계의 우려를 잠재우는 협상을 주도했다는 평가다. 공적자금 회수보단 고용 승계 등 노동 이슈를 매각의 최우선 쟁점으로 두고 진행한 결과다. 노동계의 한 인사는 “이 회장이 기업 매각에서 공적자금 회수도 중요하지만 고용 승계를 우선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뚝심 있게 일을 진행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 과거 부실기업 구조조정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던 노사 갈등 논란은 이 회장 체제에선 거의 없었다. 10여 년간 새 주인을 찾지 못하다 중흥건설에 매각된 대우건설만 해도 현재까지 고용 승계가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러나 모든 과정이 매끄러웠던 건 아니다. 기업 매각 때마다 헐값 매각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구조조정이 지연 또는 무산되면서 근로자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도 없지 않았다. 대우조선해양과 아시아나항공, 쌍용차와 KDB생명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 기업은 이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다. 이 회장은 대우조선해양의 새 주인으로 현대중공업을 낙점하고 3년여 동안 두 기업 간 인수·합병(M&A)을 추진했지만 결국 불발됐다. 올해 유럽연합(EU)이 기업결합 심사 승인을 불허한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경쟁국의 훼방은 산은이 컨트롤하기 어려운 외부 요인이란 점에서 온전히 이 회장과 산은의 잘못으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산은이 EU의 상황을 간과했다는 비판은 면하기 어렵다. 두 기업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 점유율을 합하면 60%에 달할 만큼 절대적인 비중이 된다. 그런데 EU는 천연가스 의존도가 다른 나라보다 높은 편이다. EU 입장에서 두 기업의 합병은 LNG 운반선 독과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U 반독점당국은 올해 초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LNG 수송선 건조를 독과점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미 두 기업의 합병 추진 당시 시장 점유율이 우려할 수준이었는데도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해 M&A가 불발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상황에선 조선 3사가 (업황 침체로 저가 수주에 내몰리는) 과잉 출혈 경쟁을 하는 수밖에 없어 수익성 개선이 어렵다”며 ‘빅2’ 체제로의 재편 필요성 크기 때문에 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전했다.

아시아나항공도 비슷한 이유로 미국에서 기업결합 심사 통과가 지연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심사 중인 미국 법무부가 지난달 심의 수준을 ‘간편’에서 ‘심화’로 높이기도 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이 성사되면 시장 경쟁이 제한될 우려가 크다고 보고 까다로운 심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미 법무부가 두 회사의 합병에 까다로운 승인 조건을 제시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합병 작업에 빨간불이 켜진 게 아니냐는 분석마저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엔 기업 구조조정에서 국책은행의 역할과 저돌성이 중요했지만, 요즘은 국내·외 공정당국의 심사가 더욱 중요한 시대”라며 “산은이 이를 더 고려해서 매각 전략을 짰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에서마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조건부’로 승인할 만큼 까다로운 심사에 나선 바 있다. 일부 노선에 대한 독점 우려가 높다는 이유에서다.

쌍용차와 KDB생명은 아예 매각 직전까지 갔다가 틀어져 해당 기업 근로자들은 물론 투자자들까지 한층 원성을 높인 경우다. 쌍용차의 최종 인수 후보였던 에디슨모터스는 천연가스버스 등을 생산해 사업 관련성이 있었지만, M&A를 하기엔 자금력이 부족하고, 자금조달계획이 불투명하다는 시장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쌍용차 회생계획안에 따르면 이 회사 채무 변제에만 8348억원이 필요해 자금력이 충분한 인수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에디슨모터스가 쌍용차를 인수하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시장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우가 고래를 품는 격’이라는 여론이 많았다. 특히 에디슨모터스 측이 투자조합을 활용하는 등 기업 사냥꾼 방식의 합병을 시도했지만, 산은은 주요 채권단으로서 적극적인 문제 제기는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채권단으로서 최소한의 인수 후보 검증마저 소홀히 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흘러나왔다.

올해 초 에디슨모터스가 공장 부지에 아파트를 지어 운영 자금 등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을 때는 시장에서조차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이 회장마저 “기업 인수·합병 과정에서 제일 안 좋은 차입매수(LBO) 방식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산은 스스로 에디슨모터스가 인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한 셈인데, 이후에도 명확하게 제동을 걸지 않았고 결국 합병은 무산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 투자자들에게 돌아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말부터 올해 3월 말까지 외국인과 기관은 상장사인 에디슨EV 주식을 350억원어치 순매도했지만, 개인 투자자는 773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에디슨모터스의 쌍용차 인수 불발에 따른 주가 폭락 피해를 개인 투자자들이 떠안게 된 셈이다. 에디슨EV는 채무를 갚지 못해 최근 채권자에 의해 파산 신청이 접수 됐다.

이에 대해 산은은 “산은은 쌍용차의 최대주주가 아니고 매각 계약 주체도 아니다”라며 “채권단이지만 매각 관련 의사결정권이 없으며, 회생법원이 판단할 문제”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는 책임 회피로도 읽힌다. 채권자 입장에서 인수자의 채무 변제 계획 등 성공적 구조조정 실현 가능성을 우선시해 매각 추진 과정에 충분히 반영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산은의 자회사인 KDB생명도 이 회장이 주도한 매각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산은의 구조조정 역량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만 키웠다. 사모펀드 운용사(PEF)인 JC파트너스에 매각할 계획이었지만 JC파트너스가 보유한 다른 보험사인 MG손해보험이 최근 금융당국으로부터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되면서 합병이 무산됐다. 이 또한 산은의 매각 전략에 허점이 컸던 게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게 하는 대목이다.

새 정부, 산은 역할 재정립 나서야

이미 매각을 끝냈지만 성과 면에서 혹평을 받는 경우도 있다. 금호타이어가 대표적이다. 금호타이어는 이 회장의 주도로 2018년 중국의 타이어 업체인 더블스타에 매각됐다. 하지만 계속된 적자로 최근까지도 부분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투자자와 근로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근래 들어 국내 공장 철수설도 나오고 있다. 더블스타는 금호타이어 인수 이후 트럭·버스용 타이어(TBR) 판매 강화에 힘쓰고 있는데, TBR은 중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월등히 우세해 국내 업체엔 불리한 시장이다. 더블스타가 이를 근거로 국내 공장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게 금호타이어 노조 등의 우려다. 산은이 금호타이어를 너무 무리하게 경쟁국인 중국 업체에 매각했던 게 아닌지, 그로 인해 지속 가능한 구조조정이 어려워진 게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려가고 있는 이 회장의 4년 7개월을 반면교사 삼아, 새 정부가 산은의 역할 재정립에 나서야 한다고 분석한다. 재계의 한 고위 인사는 “국책은행 ‘만능 시대’가 저물었는데 정부·금융당국과 산은의 사고관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기로에 선 산은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산은을 지금보다 유연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