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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우크라 동남부 장악해 ‘노보러시아’ 창설 야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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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호 06면

러, 우크라 침공 73일째 어떻게 돼가나

러시아 군인들이 지난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9일 진행될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 열병식을 앞두고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 군인들이 지난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9일 진행될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 열병식을 앞두고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7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73일째를 맞이한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넓게 연루되고 깊게 개입된 국제전이라 쉽게 끝날 리 만무하다. 유라시아 패권 장악에 필수적인 전략적 요충지 우크라이나라면 더더욱 그렇다.

‘동(러시아)’과 ‘서(미국 및 유럽연합)’ 사이의 지정학적 위치, 유럽 최대의 영토 규모, 4400만 인구, 방대한 지하자원과 최강의 농업생산력, 강한 근육질의 산업생산력 등 잠재적·현실적 국력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의 대외적 선택은 유라시아의 세력 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 확대로 새로이 구축되는 유럽의 정치 지형에서 우크라이나가 어디에 속하느냐는 유럽을 넘어 유라시아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은 냉전의 관성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에게 상호 제로섬적인 지정학적 목표를 제시한다. 이번 전쟁이 미·러의 대리전 형태로 진행되는 이유다.

18세기 우크라 동남부에 ‘노보러시아’

지난 2월 24일 개전 이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6차례 협상이 진행됐지만 아직까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5차 회담에서는 협상의 돌파구가 마련되는 듯했다.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가 거의 항복 수준의 협상안을 제시하자 러시아가 긍정적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정부는 자국의 주권과 안보를 국제적으로 보장해 줄 경우 크렘린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크라이나의 중립화·비핵화 지위 명문화, 돈바스 지역 도네츠크·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 인정, 크림반도의 러시아 병합 수용 가능성 등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역시 디테일에 있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 5차 회담에서 핵심 쟁점에 극적인 가합의에 이르렀지만 이후 세부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노정됐다. “무기 빠진 협상은 악기 없는 연주”라 했던가. 협상의 톤이 달라진 이유는 전황을 봐가며 협상의 조건을 달리하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가합의안이 미국의 구상과 배치된다는 점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조금씩 우크라이나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세도 한몫했다. 협상 타결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지난 4월 20일 모스크바는 자국의 요구와 제안을 담은 새 협상안을 최후통첩 형식으로 키이우에 보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생래적으로 국제전·대리전 성격을 지녀 출구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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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동안의 전쟁 수행 양태와 과정을 살펴볼 때 크렘린 전략가들이 기획한 우크라이나 침공 시나리오는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다. 먼저 플랜 A는 미사일과 항공 전력, 공수 및 기갑병력 등 첨단 군사 자산을 집중 투입해 수도 키이우를 속전속결로 접수한 후 젤렌스키 정권을 축출하고 친러 정권을 수립하는 방안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점령 통치보다는 괴뢰정권 수립을 목표로 한 듯하다. 러시아가 침공 명분으로 탈나치화와 탈군사화를 내세우고 전쟁이란 표현 대신 ‘특별 군사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한 데서 그 추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플랜 A는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결사항전 의지, 해빙으로 인한 최적의 침공 시점 실기, 러시아군의 미숙한 작전 운용 등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신속한 키이우 점령이 무위로 그치자 푸틴은 동부 돈바스 지역으로 공세의 초점을 옮겨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의 미수복 지역을 차지하려는 플랜 B 계획을 실행했다. 2014년 시작된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돈바스로 알려진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주 친러 반군세력은 주 영토의 절반 이하만 차지한 채 독립을 선포했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는 체첸 악마부대, 시리아 용병, 푸틴의 그림자 군사 조직인 와그너 용병 그룹 등을 동원해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데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예군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도네츠크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아조우 제철소만 함락하면 이 목표는 거의 달성된다. 푸틴에게 돈바스 지역의 완전한 해방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성 확보와 오는 9일 전승기념일 행사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플랜 C는 돈바스 전역 확보 후 그 여세를 몰아 크림반도로 이어지는 육로 회랑을 만드는 계획이다. 러시아는 지난달 3일 크림반도 북쪽 헤르손주 함락에 성공했다. 아조프해를 따라 헤르손주와 도네츠크주 사이에 있는 자포리자주도 절반 이상 수중에 넣었다. 플랜 C가 현실화되면 돈바스와 크림을 잇는 육상 통로를 확보하게 되고 동시에 흑해 속 또 하나의 작은 바다 아조프해를 독차지하게 된다.

플랜 D는 크림에서 몰도바로 연결되는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확보하는 계획이다. 몰도바 동부에는 중앙정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친러 자치공화국인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위치해 있다. 미콜라이우주와 오데사주를 점령하면 크림반도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이어지는 두 번째 남부 육상 회랑이 열리게 된다. 최근 러시아군은 남부 거점 항구도시 오데사를 공습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공격의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플랜 D가 완성되면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돼 흑해가 다시 완벽하게 러시아 수중으로 떨어지게 된다.

플랜 B·C·D는 군사작전상 우선순위를 나눈 것일 뿐 모두 동시 병행적으로 완수해야 할 군사 목표에 해당한다. 요컨대 특별 군사작전 2단계에서 러시아군의 과제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과 남부 지역을 완전 통제해 예전처럼 흑해를 ‘내해화’하는 것이다. 키이우와의 협상에서 모스크바의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 동남부를 분리해 신생국 창설을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정책의 핵심은 우크라이나를 친러 국가화하거나 서구와의 전략적 완충지대로서 비무장 중립국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여의치 못할 경우 국가 안보와 국익 옹호 차원에서 스스로 완충지대를 설정하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이미 독립을 선포한 도네츠크·루한스크주 이외에 이번 특별 군사작전에서 접수한 동남부의 하르키우·자포리자·헤르손·미콜라이우·오데사주를 한 데 묶어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푸틴은 이미 2014년 4월 국영TV 인터뷰 도중 ‘새로운 러시아’라는 의미의 ‘노보러시아(Novorossiya)’를 새 국명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노보러시아는 18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을 묶어 새로 만든 행정구역 명칭이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할양받거나 코사크 군사 조직이 확보한 일련의 지역을 병합해 노보러시아라는 자국령을 만들었다. 노보러시아라는 신생국이 출현하면 우크라이나는 바다로의 출구를 상실한 내륙국가로 전락하게 되고 동시에 동부에 밀집한 석유화학·제철·항공산업 등 경제의 척추를 잃게 된다. 인구도 2300만 명 수준으로 줄고 국내총생산(GDP)도 3분의 1로 쪼그라들며 분단국으로 남게 된다. 반면 러시아는 옛 소련처럼 흑해 일대를 공고히 장악할 수 있게 돼 유럽, 특히 지중해를 향한 힘의 투사 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노보러시아의 창설은 푸틴의 유라시아 지도 다시 그리기, 즉 재소련화 야망과 맞닿아 있다. 옛 소연방 구성국에 속해 있지만 사실상 독립국 지위를 누리고 있는 조지아의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 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 등 친러 성향의 자치공화국들을 크림 병합 때처럼 기회를 엿보며 러시아연방의 일원으로 하나씩 귀속시켜 나갈 것이다. 우크라이나 동남부를 완벽히 장악해 노보러시아가 수립될 경우 이 신생국들도 시간을 두고 주민투표라는 명분을 내세워 러시아연방에 편입시킬 것이다.

푸틴, 친러 자치공화국 병합 지속할 듯

푸틴의 야심은 우크라이나 분할에 그치지 않는다. 벨라루스와의 국가연합에 더욱 속도를 낼 것이고 카자흐스탄도 넘볼 것이다.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푸틴의 지원 덕분에 2020년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고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벨라루스는 형식만 주권국가일 뿐 이미 꼭두각시 국가로 전락했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와 한몸처럼 움직였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대해서도 관리·통제 전략에 들어갔다. 카자흐스탄에서 신·구 세력 간 격렬한 권력투쟁이 포착되자 지난 1월 푸틴은 배후 폭동의 연출과 군대 투입 등을 통해 크렘린 눈 밖에 난 ‘상왕’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을 제거했다. 대외 정책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보인 나자르바예프를 손절하고 친러 성향의 현 대통령을 간택해 벨라루스의 루카센코처럼 크렘린의 요구와 의도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결박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역(逆) 색깔혁명’으로 규정한다.

이 같은 푸틴의 재팽창 야욕이 탄력을 받을 경우 이는 미국의 유라시아 패권 유지에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대표적 전략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경고대로 소연방의 후속체로서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제국이 발현해 미국의 지정학적 운신 폭을 크게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푸틴의 제국적 야망을 제어할 뾰족한 묘안이 없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강의 핵보유국”이란 푸틴의 겁박에서 크렘린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국익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제2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된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데자뷔로 여겨지는 이유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러시아연방 정치학회 정회원으로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한러관계 30년-성찰과 비전』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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