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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한목소리 '국민'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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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국회에서 여야는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법안을 놓고 충돌했다. 과반 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의 목표대로 마무리됐다. 대립 속에 자주 등장한 단어가 ‘국민’이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회의장에는 ‘국민을 위한 검찰 정상화’ 문구가 내걸렸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명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국민만 피해를 볼 수 있는 제도”라고 반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해당 법안을 공포한 국무회의에서 검찰 수사와 관련해 “국민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고 말했다. 입장이 다른 정치권이 공통으로 외치는 국민은 도대체 누구인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항의하는 가운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중 하나인 검찰청법 개정법률안(대안)이 표결처리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항의하는 가운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중 하나인 검찰청법 개정법률안(대안)이 표결처리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서구에서 ‘피플(people)’에 해당하는 국민을 백과사전은 ‘인민’으로 소개한다.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 말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민이란 표현을 쓰지만 국내에선 국민으로 정착했다. 왕정이나 특권 계층이 주도하던 질서가 사라진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주권의 원천으로 이해된다. 국민의 투표 결과로 정부가 꾸려지고, 통치권도 국민이 위임한 범위 내에서 행사될 때 존중받는다.

정치권이 틈나면 꺼내는 국민
사안에 따라 이해관계도 민감
설득과 동의 절차 더 중요해져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선 정치권이 국민을 자주 거론할수록 갈등이 심한 경우가 많다. 알고 보면 특정 진영에서만 환영받을 일이거나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정책을 추구하면서도 뭉뚱그려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가 많다. 노선과 정책 기조가 엄연히 다른 정당끼리 서로 다른 공약을 내걸고 선거를 치르면서도 국민을 앞세우기 일쑤다.

 하지만 한국 유권자는 국민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분화돼 있다. 이념 성향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고, 어느 정도 이와 맞물려 지지 정당이 다른 거대 집단이 존재한다. 개인의 가치가 중요해지고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격차와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세대나 젠더 간 갈등도 분출하고 있다. 한국은 엄청난 인구가 현안을 다룬 기사에 매일 댓글로 실시간 의사를 표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고, ‘태극기’와 ‘대깨문’이 공존하는 환경을 국민이란 단어에 담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권은 한목소리를 내는 국민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난 대선의 득표율 격차가 0.73%포인트에 그친 것처럼 의견이 분열돼 있음을 직시하라는 얘기다. 특정 진영 지지자가 반기는 일이라면 반대 진영 지지자는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을 늘 염두에 둬야 국민을 앞세우며 자기 확신에 빠지는 우를 피할 수 있다. 오히려 국민은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여전히 지역구도가 사라지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혜택을 따져 표를 행사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지난 2월 서울 광화문 열린마당에서 열린 ‘코로나 피해 실질 보상 촉구 및 정부 규탄대회’에서 자영업자가 손실보상을 촉구하는 내용의 머리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서울 광화문 열린마당에서 열린 ‘코로나 피해 실질 보상 촉구 및 정부 규탄대회’에서 자영업자가 손실보상을 촉구하는 내용의 머리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을 책임지게 될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은 이미 이해투표를 한 유권자의 반응을 마주하는 중이다. 대선 공약에서 후퇴하자 즉각 비판이 나온다. ‘취임 즉시 이병부터 병사월급 200만원’을 공약했지만 재정 형편상 시기를 늦추자 20대 남성들이 “당선되니 배신하느냐”고 들끓는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인수위원회가 못 박지 않은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원금이 공약에 미치지 못한다며 소상공인이 발끈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후보자가 주식 양도소득세 폐지 공약과 다른 말을 하자 실망 여론이 일었다.

 이제 정치의 영역에선 세대나 젠더 내에서조차 이해가 엇갈리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동의를 구할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부동산 세제 개편이나 연금 개혁 등 시급한 과제에서 손쉬운 정답은 없다. 누군가 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고 여긴다. 불만과 이견을 가진 이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느냐가 정책의 성패를 가르고, 이를 이뤄낼 때 진정한 국민 통합이 가능하다.

 특히 이런 태도는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하는 윤 당선인과 새 정부에 필요하다. 윤 당선인은 능력 위주로 내각 후보를 골랐다지만 이를 선보이기도 전에 자격 시비에 휘말린 이들이 많다. 협치는 진영 구도를 깨려는 창조적 도전을 통해야 겨우 가능할지 모른다. 이주열 전 한은총재는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됐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유임시켜 임기 말까지 근무토록 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책임졌던 이들에게 계속 업무를 맡기거나, 일부 요직 추천을 상대 정당에 제안하면 어떨까. 유권자의 속내가 다양해질수록 선거에서 '묻지마 지지' 경향은 약화할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협치의 노력과 리더십의 진솔한 이해 구하기만이 이 시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