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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우아한 퇴장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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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지난달 27일 미국 상원 세출위원회가 2023 회계연도 국무부 예산을 심의하는 소위원회 회의실. 소위원장을 맡은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이 “30년 넘게 소위에서 헌신적으로 책임을 다해줘 감사하다”며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에게 덕담을 건넸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외교와 개발원조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을 옹호하고 8개 정권에 걸쳐 국무장관들의 동반자가 돼 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레이히는 1974년 버몬트주에서 당선된 이래 48년간 상원의원으로서 8명의 대통령을 경험한, 의회의 ‘전설’ 이다. 올해 82세인 그는 오는 11월 9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올봄이 그의 마지막 예산 심의 참여가 된다. 동료들은 회의 중 짬을 내 그를 예우했다.

지난달 27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이 상원 세출위원회 외교 소위원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7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이 상원 세출위원회 외교 소위원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자신에 대한 칭찬이 쏟아질 때 그는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전화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잠시 뒤 돌아온 그가 “밖에서 여러분의 친절한 말씀 잘 들었다. 곧장 뛰어들어오지 않은 이유는 너무 즐겼기 때문이다.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자 웃음이 터졌다. 레이히는 “제겐 과분하지만, 대단히 감사하다(undeserved but greatly appreciated)”고 했다. 당연한 듯 덥석 받지 않는 매너, 칭찬받을 만한지 잘 모르겠다는 겸양이 그의 품격을 더욱 높였다.

겸손이 몸에 밴 미국 지도자들을 자주 본다. 자신을 낮출수록 올라간다는 것을 아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레이히 상원의원은 실세 중 실세다. 정부 예산 씀씀이를 관리하는 세출위원회 위원장이고, 대통령 부재 시 권력 승계 서열이 부통령·하원의장 다음 3위인 상원 임시의장이다.

반세기 정치 여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갈 채비를 하는 그의 모습은 그즈음 방송된 문재인 대통령 인터뷰와 대비됐다. 성과는 부풀리고 실정은 모른 체하고, 아직 출범도 안 한 차기 정부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훈수까지 두는 모양새는 문 대통령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로 보였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에서 현직 대통령이 임기 종료 직전에 차기 대통령을 포함,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계층을 향해 이토록 한기 서린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놓은 적이 있나 싶다. 끝내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 현대사에서 가장 황당하게 퇴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외에는 기억에 없다.

레이히 상원의원은 지난해 11월 불출마를 선언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의사봉을 내려놓을 때다. 위대한 우리 주를 위해 이 일을 이어갈 다음 사람에게 횃불을 넘겨줄 때가 됐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