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뿅뿅 다리’에 누워 물소리를 들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5.0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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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소설가 김탁환씨가 전남 곡성으로 내려가 농부 과학자 이동현 대표의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에서 문화생태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두 남자가 평소 거닐던 태안사 숲길을 함께 걸었다. 왼쪽이 농부를 꿈꾸는 소설가고 오른쪽이 농부가 된 과학자다.

소설가 김탁환씨가 전남 곡성으로 내려가 농부 과학자 이동현 대표의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에서 문화생태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두 남자가 평소 거닐던 태안사 숲길을 함께 걸었다. 왼쪽이 농부를 꿈꾸는 소설가고 오른쪽이 농부가 된 과학자다.

연두와 초록이 교차하는 계절, 전남 곡성으로 내려갔다. 섬진강 신록이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소설가가 거기 낡은 폐교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김탁환(54). 문단이 참여문학이 어쩌고 순수문학이 어쩌고 떠들던 시절, 이야기의 힘을 믿고 묵묵히 역사소설의 길을 걸었던 작가다. 시류에 맡겼다면 지금쯤 SF 작가가 됐을 법한 그가 시골에 내려가 벼농사를 짓고 글 쓰며 산다는 소식에 궁금증이 일었다. 4월 28일 곡성에서 농부가 된 과학자와 농부를 꿈꾸는 소설가를 만나 이틀을 걸었다. 둘째 날 아침 봄비가 내렸다. 흙내가 확 끼쳤다.

발아의 시간

미실란 텃밭. 쌀 미(米) 자를 형상화했다.

미실란 텃밭. 쌀 미(米) 자를 형상화했다.

김탁환이 정착한 자리는 ‘미실란’이다. 일본에서 미생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동현(53) 대표가 2006년 옛 곡성동초등학교 터에 설립한 농업회사법인이다. 미실란은, 농부가 된 과학자가 연구·개발한 유기농 발아현미와 그 가공식품을 파는 회사다.

미실란 ‘밥cafe 飯(반)하다’의 유기농 채식밥상.

미실란 ‘밥cafe 飯(반)하다’의 유기농 채식밥상.

서울의 소설가가 곡성의 농부 과학자를 알게 된 건 2018년 3월 1일이다. 지리산에 내려와 바람 쐬고 올라가는 길, 전라도에 사는 친구가 미실란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예약했다. ‘밥cafe飯(반)하다’. 그곳에서의 밥 한 끼가 작가의 인생을 바꿨다. 훗날 작가는 “그날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만났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날의 밥상이 계기가 된 건 분명하다. 그즈음 비건(Vegan·적극적 채식주의자)을 선언한 작가는 고기는커녕 젓갈도 안 들어간 미실란 밥상에 감동했다. 발아현미로 지은 밥과 동네에서 거둔 채소 반찬만으로 차린 유기농 채식밥상이었다. 이날 이후 소설가는 뻔질나게 미실란을 들락거렸다.

2021년 1월. 소설가는 아예 곡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1주일에 닷새는 곡성에서 살고 주말에 서울 집에 올라왔다. 요즘 유행한다는 ‘5도2촌(5都2村)’이 아니라 ‘5촌2도’ 생활이다. 오전에는 미실란 2층 집필실에서 글 쓰고 오후에는 이동현 대표와 논에 나가는 일상을 반복한다. ‘올해 심은 식물들. 벼(630개 품종), 해바라기·배추·국화·바질·상추·가지·곰취 등’. 지난달 출간한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2021년 11월 9일자에서 인용했다. 이날 일기만 보면 영락없는 농부의 일기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난해 12월 18일에는 미실란 건물 옛 교무실 자리에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었다. 주로 생태 관련 책 500종을 들였는데, 책 300종의 소개 글을 작가가 일일이 써 걸어놨다. 책방 구석에선 1g 단위로 쌀도 판다. 책과 쌀을 나란히 파는 가게라니. 김탁환은 “이야기 학교를 열어 동네 주민에 글쓰기도 가르친다”며 “이동현 대표와 문화생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걷다가 눕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곡성 읍내에 사는 김탁환 작가가 미실란을 걸어서 출퇴근할 때 지나는 명소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곡성 읍내에 사는 김탁환 작가가 미실란을 걸어서 출퇴근할 때 지나는 명소다.

김탁환은 수시로 곡성 구석구석을 걷는다. 글이 안 풀리거나 농사가 고되면 일단 걷는다고 했다. 가장 자주 걷는 길은 출퇴근 길이다. 읍내에서 미실란까지 걸어서 40분 걸리는데, 중간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있다. 자동차 달리는 가로수길 옆으로 흙길이 있어 하루 두 번 곡성의 명승을 곁에 두는 호사를 누린다.

장선습지. 미실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장선습지. 미실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미실란에서는 짬짬이 장선습지로 산보를 나선다. 10분만 걸으면 습지다. 미실란에서 키우는 개 ‘복실이’를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견학 온 단체 손님과 어울려 걷기도 한다. 미실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산책로는 태안사 가는 길에 있는 ‘숲멍길’이다. 차로 20분쯤 달려 태안사 어귀 조태일문학관 앞에 주차한 뒤 능파각까지 숲 우거진 계곡을 따라 1.5㎞를 걸어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계곡을 따라 오솔길과 데크로드가 잘 나 있다. 이 대표와 계곡을 올라간 뒤 능파각 난간에서 책 읽다가 까무룩 낮잠이 들었던 일화를, 김탁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낮잠 일화도, 소년 같았던 얼굴도 부러웠다.

침실습지에서 섬진강을 깔고 누운 김탁환 작가와 이동현 대표. 수시로 이렇게 나와 논단다.

침실습지에서 섬진강을 깔고 누운 김탁환 작가와 이동현 대표. 수시로 이렇게 나와 논단다.

김탁환이 숨겨둔 산책 코스는 침실습지에 있다. 침실습지는 국가보호습지다. 섬진강 중상류 강변에 들어선 하천습지로, 버드나무와 갈대 무성한 강변 초원에 수달·삵·남생이 같은 야생동물이 산다. 침실습지에 사는 생물만 665종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 사람 무시로 다니는 동네 습지가 보호종으로 지정된 야생동물의 터전이다. 곡성에서 사람은 이렇게 자연과 어울린다.

습지에 자동차는 못 다니는 철제 다리가 있다. 다리 철판에 구멍을 퐁퐁 내 ‘퐁퐁 다리’다. 두 남자는 ‘뿅뿅 다리’라고 따로 부른다. 강물이 불면 구멍을 통해 물이 올라오는데, 그때 뿅뿅 소리가 난단다. 다리 복판에서 한참 ‘강멍을 때리던’ 두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고 드러누웠다. 그들을 따라 나도 누웠다. 등을 타고 발랄한 물소리가 올라오더니 이내 온몸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곡성에서 만난 농부 소설가와 농부 과학자는 길을 걷다 여차하면 누웠다. 곡성의 산과 강처럼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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