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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게 한둘 아니다"…결재까지 받은 '614억 횡령'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직원의 600억원대 횡령 사고가 드러난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의 모습. 연합뉴스

직원의 600억원대 횡령 사고가 드러난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의 모습. 연합뉴스

“사고를 막는 체계가 작동하거나, 자금 이체가 이뤄진 뒤 확인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달 28일 드러난 우리은행의 600억원대 자금 횡령 사건을 바라보는 한 금융권 관계자가 남긴 말이다. 6년(2012~18년)에 걸쳐 거액의 돈이 빠져나가는 동안 은행 내부에서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은행과 금융권 종사자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의문점이다.

특히 횡령 혐의를 받는 전모씨가 실무를 담당하는 차장급 직원이었다는 점도 일반적이지 않다는 시각도 많다. 부서를 총괄하는 팀장이나 본부의 운영을 책임지는 본부장보다 접하는 정보와 권한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부서의 팀장도 아닌 단순 실무자가 내부 감시망을 피해 거금을 빼돌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둘러싼 의문점과 금융권 종사자들의 시각을 일문일답 형태로 정리했다.

차장급 실무자가 자금 횡령 가능?

자금을 빼돌리기로 마음먹은 실무자가 해당 부서의 내부 사정에 밝으면 관리자급이 아니더라도 횡령은 가능하다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내부 사정에 밝을수록 그렇다. 실제로 전모 차장은 두 차례(2012~18년, 20~22년)에 걸쳐 총 9년 가까이 본점 기업개선부에서 근무했다. 한 부서에 오랫동안 근무한 만큼 자금 운용 방식 등을 꿰뚫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보통 은행원은 순환근무제에 따라 길어야 4년여 한 부서에서 근무하는 점을 감안하면 전모 차장의 상황은 이례적이다. 다만 그가 몸담았던 기업개선부가 기업 매각과 구조조정 업무 등을 담당해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 필요했던 만큼 장기간 한 부서에 근무할 수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부서일수록 업무가 손에 익은 직원이 자리를 옮기면 업무 효율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업무 능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청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시중은행이 희망퇴직을 늘리고 채용문을 좁히는 등 몸집을 줄이며 전문성이 필요한 본점 부서에서 일할 대체인력이 적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6년 간 614억 인출, 들통나지 않은 건

전모 차장은 횡령 과정에서 내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세 차례 서류를 위조했을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그가 손을 댄 돈은 2010년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 파기 후 계약금 반환을 두고 이란 가전업체 엔텍합의 대주주인 다야니가(家)와 국내 채권단 사이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으로 묶여있는 계약금(578억원)이었다.

분쟁 등에 엮인 만큼 운용이나 지출을 할 수 없는 자금이었다. 채권단이나 은행 내부의 관심이 덜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각지대에서 잠자고 있는 돈이었단 이야기다. 부서 자금 사정 등에 밝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자금 인출 과정도 치밀했다. 그는 2012년(173억원)과 2015년(148억원) 두 번에 걸쳐 자금을 부동산신탁 전문회사 맡긴다는 명목으로 서류를 위조해 계약금 일부를 수표로 인출했다. 이후 유령회사인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하고 대주주인 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의 기업인 것처럼 만든 뒤, 계약금 관리 주체를 캠코로 넘긴다는 서류를 또다시 위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8년 나머지 자금(293억원)을 ‘유령회사’의 계좌로 보낸 뒤 기존 계좌는 해지했다. 연이어 거액의 자금을 이체했지만, 근거가 되는 증빙서류를 꾸며놨기 때문에 횡령을 의심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만 소송 결과에 따라 이란 다야니가에 돌려줘야 할 가능성이 있는 계약금을 부동산신탁 전문회사에 맡기기로 한 서류를 부서나 은행 내 상급자가 결재한 게 통상적이지 않다는 시각은 많다.

기업 간 인수합병(M&A) 업무 등에 밝은 한 은행권 관계자는 “보통 계약금으로 묶인 돈을 수익을 내려 부동산신탁 전문회사에 맡기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다”며 “요구불계좌 등 예금에 따른 이자만 발생하는 계좌에 안정적으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회삿돈 614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우리은행 직원 A씨가 30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회삿돈 614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우리은행 직원 A씨가 30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 당국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았는데

거액의 돈이 움직였음에도 금융당국에 의심 거래로 포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의문도 있다. 원칙적으로 1000만원 이상의 현금 거래가 이뤄지면 시중은행에서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 자동 신고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감시망에도 걸려들지 않았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전모 차장이 횡령 자금을 두 차례 수표로 인출하고, 자금 이체에 따른 증빙 서류를 위조하면서 금융 당국의 감시망도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현금거래 이외에는 자금세탁 등이 의심되는 거래만 은행이 FIU에 보고하게 돼 있어서다. FIU는 은행이 보고한 내역을 살펴본다. 게다가 수표 거래는 FIU에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

FIU 관계자는 “1000만원 이상의 현금거래가 아닌 이상 은행으로부터 보고가 없으면 FIU가 파악하기 어렵다”며 “은행 측에서 이상 거래로 보고를 했더라도 관련 법에 의해 (은행의) 보고 여부 등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횡령 자금이 대우일렉 계약금 맞나

우리은행 측은 전모 차장이 횡령한 자금에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에 나섰던 이란의 가전업체 엔텍합이 지불한 계약금(578억원) 일부가 포함됐다고 밝혔다. 2019년 영국 고등법원이 ISD 패소 판정을 취소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청구를 기각하면서 정부의 패소가 확정됐다.

하지만 배상금(계약금) 반환은 미뤄졌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외환·금융거래가 제한돼서다. 그러다 올해 초 미국의 송금 허가가 떨어지면서 그의 횡령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때문에 배상금 지급도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금융 당국은 엔텍합에 지불해야 할 배상금은 이미 송금했다는 입장이다. 해당 사정에 밝은 금융당국 관계자는 “채권단이 몰취했던 (578억원의) 계약금은 이미 이란 측에 송금됐다”며 “채권단이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다음 해당 자금(계약금)은 정상적으로 반환된 상황이고, 횡령 자금이 ISD 소송으로 묶여 있던 돈인지는 수사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횡령한 614억의 행방은

전모 차장이 빼돌린 614억원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그는 경찰에 횡령금 중 500억원가량은 파생상품과 선물에 투자해 모두 소진했고, 100억원가량은 뉴질랜드 골프장 사업 투자를 위해 동생에게 이관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사 당국은 자금 용처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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