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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번 읽고 또 그 책을 펼치네요…노키즈존이 새삼 부끄러운 이유 |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하며

중앙일보

입력 2022.05.05 06:00

오늘 소개할 『안나의 빨간 외투』는 저희집 9세 어린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가장 좋아하던 그림책입니다. 최근 동생(5세 어린이)의 책장을 정리하면서 창고에 있던 이 책이 다시 책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동생보다 9세 어린이가 이 책을 더 자주 펼쳐보더라고요. 한 300번은 읽었을 책인데 말입니다. 왜 그렇게 이 책이 좋은지 물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새 옷이 생기는 건 기분 좋은 일이잖아!”

사실 양육자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기분 좋은 상황만은 아닙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거든요. 생사가 오가는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빵집도, 옷가게도, 식료품 가게도 문을 닫았어요. 안나의 꽉 끼는 외투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표정을 좀 보세요. 그가 살아내는, 아니 견뎌내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꽉 끼는 외투를 입은 안나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표정이 어둡다. 아이를 홀로 키우며 전쟁을 통과한 그의 삶이 어찌 고단하지 않겠나. 엄마의 사정을 아는지 안나는 밝기만 하다.

꽉 끼는 외투를 입은 안나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표정이 어둡다. 아이를 홀로 키우며 전쟁을 통과한 그의 삶이 어찌 고단하지 않겠나. 엄마의 사정을 아는지 안나는 밝기만 하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물건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때 멋진 새 외투를 사줄게.”

엄마는 지난 겨울 안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 겁니다. ‘전쟁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겠죠. 물건을 산다는 건, 새 외투를 산다는 건 내일이 있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내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일을 준비하고 싶어도 준비할 수가 없었죠. 돈도 없거니와 물건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안나의 엄마는 강인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안나야, 엄마는 돈이 없단다. 대신에 할아버지의 금시계랑 멋진 물건들을 가지고 있지. 외투를 새로 만들려면 그 물건들이 쓸모가 있을 거야.”

엄마는 안나를 데리고 양 농장에 갑니다. 그리고 농부 아저씨에게 금시계와 양털을 바꾸고 싶다고 말합니다. 농부 아저씨는 봄에 오라고 하죠. 양털은 봄에 깎으니까요. 봄이 올 때까지 안나와 엄마는 매주 일요일 양을 만나러 갑니다. 안나는 양들에게 마른풀을 주고, 껴안아주고, 크리스마스엔 종이 목걸이와 사과를 선물로 주기도 하죠.

봄이 되자 농부 아저씨는 양털을 깎았어요. 양털을 건네받은 엄마는 물레질하는 할머니를 찾아가 램프를 주고 실을 자아달라고 합니다. 털실을 받자 숲속으로 가 산딸기를 땁니다. 물을 들이려고요. 안나가 빨간 외투를 입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옷감 짜는 아줌마에게 가죠. 아줌마는 석류석 목걸이를 받고 옷감을 짜줍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양장점이에요. 재봉사 아저씨는 로얄알버트 스타일의 찻주전자를 받고 안나의 외투를 만들어줍니다.

새 외투를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안나는 지나치는 가게마다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유리창에 자기 모습을 비춰 봅니다. 저희집 어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저도 이 장면이 좋아요. 엄마의 표정 때문에요. 이야기 초반 어둡던 엄마의 표정이, 여기에 이르러선 편안하기까지 하거든요. 엄마는 외투 덕에 살아갈 힘을 얻은 겁니다.

마침내 완성된 안나의 빨간 외투. 외투를 선물 받은 안나뿐 아니라 엄마의 표정도 밝다. 외투는 안나에게만 선물이 아니었다. 엄마도 외투 덕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

마침내 완성된 안나의 빨간 외투. 외투를 선물 받은 안나뿐 아니라 엄마의 표정도 밝다. 외투는 안나에게만 선물이 아니었다. 엄마도 외투 덕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

엄마에게 외투는 그저 옷이 아닙니다. 삶을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내일을 기다리겠다는 의지입니다. 내일이고 희망이죠. 안나에게 새 외투를 입히기 위해 엄마는 농장 주인을, 실 잣는 할머니를, 옷감 짜는 아줌마를, 재봉사 아저씨를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고, 이들은 엄마의 여정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전쟁 직후 빵집에 빵이 없고, 식료품 가게에 감자가 없는데, 금시계가, 램프가, 석류석 목걸이가, 찻주전자가 얼마나 필요할까요? 안나의 외투를 만들어 준 어른들은 엄마가 건네는 물건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걸 알기에 안나의 엄마는 그 분들을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을 테고요.

저자와 사서, 출판사와 도서관 관계자를 대상으로 발행되는 미국의 주간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이 책을 “회복에 대한 사려 깊은 연대기”라고 평했는데요, 이 책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보지 못했습니다. 전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연대, 그리고 그를 통한 회복을 사려 깊게 기록한 이 책이 실화라는 사실은 감동을 배가시킵니다.

엄마와 달리 안나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입니다. 전쟁이 터져도 아이는 아이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안나가 아이다울 수 있는 건 안나에게 새 외투를, 내일을 선물하려고 기꺼이 팔을 걷어붙인 어른들 덕분일 겁니다. 그들 덕분에 천장 구조물이 다 드러난 집에서 홀로 안나를 키우는 엄마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고요.

엄마는 안나의 외투를 만들어준 분들을 모두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 이렇게 사랑 받고 자란 안나는 밝을 수 밖에 없다. 설령 유년 시절을 전쟁 와중에 보냈다 하더라도 말이다.

엄마는 안나의 외투를 만들어준 분들을 모두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 이렇게 사랑 받고 자란 안나는 밝을 수 밖에 없다. 설령 유년 시절을 전쟁 와중에 보냈다 하더라도 말이다.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날, 어린이와 함께 갈만한 식당을 검색하며 혹시 ‘노키즈존’은 아닌지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전쟁 와중에도 안나에게, 그리고 안나의 엄마에게 외투를 선물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한 줄 평  ‘회복에 관한 사려 깊은 연대기.’ 이 책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네요.

· 함께 읽으면 좋을 해리엇 지퍼드의 다른 책
『무대 뒤의 고양이』 고양이 사이몬의 공연장 대소동. 말썽꾸러기 아이가 고양이에게 감정이입하며 읽을 수 있는 책.

『학교는 즐거워』 입학을 앞둔 어린이와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 학교는 즐거운 곳이란다!

· 추천 연령  4~6세 어린이와 함께 읽어 보세요.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면, 치우지 말고 책장 한쪽에 꽂아두시고요. 7~9세 어린이가 혼자 구석에 앉아 읽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혼자 읽는 책은 어렵지 않아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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