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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데 대대적 열병식 왜? 푸틴은 '스탈린식 반전' 노린다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의 중요한 행사

매년 5월 9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대규모 열병식이 열린다. 국내에서는 일부 관계자나 마니아 정도나 관심을 갖지만, 이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때를 맞춰 모스크바를 방문할 만큼, 밀리터리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진 서구에서는 유명한 행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현재 러시아군의 위용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나 본의 아니게 관광 상품처럼 여겨질 정도다.

열병식은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자국민에게는 자긍심을, 적대 세력에게는 오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일종의 군사 행위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는 하나 현재는 주로 옛 동구권, 군부의 힘이 강력한 개도국, 전체주의 국가 등에서 많이 실시하는 편이다. 러시아, 중국, 북한이 대표적인데, 특히 러시아의 열병식은 동원된 부대의 규모나 공개된 장비의 수준 때문에 명성이 높다.

2021년 5월 9일 열린 전승 76주년 기념 러시아군 열병식. 매년 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모스크바를 찾는다. TASS=연합

2021년 5월 9일 열린 전승 76주년 기념 러시아군 열병식. 매년 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모스크바를 찾는다. TASS=연합

소련 시절에는 전승일이나 노동절에 몇 번 열렸던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 11월 7일 혁명기념일에 개최됐다. 1991년 연방이 해체되면서 중단되었다가 1995년 전승 50주년을 기념해서 다시 열린 이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이처럼 소련이 몰락한 후 혁명기념일에서 전승일로 날짜가 변동되었을 뿐이지 계속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소련, 러시아에게 있어 열병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특별히 의의가 있는 해에는 규모가 큰 편이다. 예를 들어 2005년에 열린 전승 60주년 열병식은 미국을 비롯한 56개국의 원수나 정부 수반이 참석했을 만큼 성대하게 열렸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의 교전 상대였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총리는 물론 냉전 시기에 적대적으로 지내던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참석했다는 사실은 세계인들에게 평화의 시대가 확실하게 열린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2005년 전승 60주년 기념 열병식에는 56개국 원수나 정부 수반이 참석해 러시아를 축하해 주었다. 이때만 해도 냉전 시대의 공포는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2005년 전승 60주년 기념 열병식에는 56개국 원수나 정부 수반이 참석해 러시아를 축하해 주었다. 이때만 해도 냉전 시대의 공포는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중요한 행사이나 열병식이 매년 열렸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소련 해체 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부터 1944년 사이를 포함해서 여러 번 개최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러시아는 전쟁 중임에도 오는 5월 9일에 열병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그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특수군사작전이라는 낯간지러운 미사여구를 버리고 전면전을 선언할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현상은 같아도 본질은 다른

아무리 그래도 우크라이나를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하는 현재의 전황을 고려한다면 대규모 열병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공공연히 피력해 왔고 이번 전쟁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것처럼, 옛 소련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던 푸틴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이런 결정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열병식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예전에 스탈린이 재미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혁명 24주년 기념 열병식이 개최되었다. 당시는 독소전쟁 발발 후 넉 달 동안 무려 300여 만의 소련군을 붕괴시킨 독일군이 모스크바 초입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엄청난 위기였음에도 스탈린은 항전 의지를 고양하기 위해 행사를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풍전등화 속에서 열병식이 열렸었다.

1941년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 당시 독일군은 모스크바 70km 근방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행진을 마친 병사들은 독일군을 막기 위해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TASS

1941년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 당시 독일군은 모스크바 70km 근방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행진을 마친 병사들은 독일군을 막기 위해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TASS

이때 스탈린은 라디오 생중계를 통해 소련은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역설했다. 연설이 끝난 후 저 멀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온 병사들을 주축으로 새롭게 편성된 부대들은 행진을 마치고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소식을 접한 세계인들은 이를 소련의 마지막 발악 정도로 생각했다. 지난 10월 10일에 독일이 승전을 선언했을 때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만큼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며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3년 6개월 후에는 베를린을 점령했다. 현재 푸틴은 예상대로 전쟁이 진행되지 않아 분위기를 전환할 계기가 절실한 상태다. 그래서 반전의 시작점이었던 1941년 열병식이 그에게 새삼스럽게 다가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리아 용병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굳이 대규모 열병식을 열 만한 합당한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번 행사를 위해 이동 중인 러시아군 장비들. 우크라이나 침공전에서 많은 장비를 상실한 상황임에도 대규모 열병식을 펼칠 예정이다. TASS=연합

이번 행사를 위해 이동 중인 러시아군 장비들. 우크라이나 침공전에서 많은 장비를 상실한 상황임에도 대규모 열병식을 펼칠 예정이다. TASS=연합

하지만 1941년은 소련이 침략을 받았던 때였고 현재는 러시아가 침략하는 중이다. 또한 전자는 패망을 걱정하던 상황이었지만 후자는 자신들이 원하면 즉시 전쟁을 끝낼 수 있다. 그래서 열병식이라는 행위만 같을 뿐이지 정작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판이하다. 이 때문에 설령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겨도 옛 소련처럼 승자의 명예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푸틴만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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