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지치던 영호, 폰 쥐고사는 미루…아이들 50년새 행복해졌나요 [어린이날 100주년]

중앙일보

입력 2022.05.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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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 1972년 국민학교 3학년 영호(9)군은 “학교 늦겠다”는 어머니의 호통에 잠을 깼다. 아침 식사를 한 뒤 도시락과 미술도구,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60개가 넘는 책걸상에 촘촘히 앉은 학생들로 빼곡한 교실은 ‘콩나물시루’ 같다. 쉬는 시간엔 딱지치기를 하거나 여학생들이 노는 고무줄을 끊는 장난이 그치질 않는다. 하굣길엔 공놀이를 하고, 집 앞에서 또 놀다 보면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의 외침이 들린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KBS 드라마 ‘여로’를 함께 봤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2. 2022년 초등학교 3학년 미루(9)양이 가장 먼저 듣는 '소리'는 스마트폰 알람이다. 밥 먹으라는 엄마 잔소리에 콘플레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학교에서 만난 반 친구 20여 명은 마스크를 쓴 얼굴이 더 익숙하다. 급식과 부교재는 학교에서 주는데도 학원 교재 때문에 가방이 그다지 가벼워지 않았다. 학원 승합차를 타고 집 근처까지 오자 스마트폰으로 엄마가 전화를 했다. ‘차 조심, 나쁜 아저씨 조심’이라는 당부가 빠지지 않는다. 저녁 식사 뒤 동생은 태블릿으로 뽀로로를, 미루는 학원 숙제를 한 뒤 유튜브로 아이돌 댄스를 봤다.

100년간 어린이 일상, 무엇이 달라졌나

1920년대 어린이들의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20년대 어린이들의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50년 터울로 비교해 본 아홉살 어린이의 일상이다. 전쟁 중에도, 유신 시절에도,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어린이는 자랐다. 어린이날은 올해로 제정 100주년을 맞았다. 어린이날은 1923년 방정환 선생을 포함한 일본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돼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속국에서 전쟁과 민주화를 거쳐 유엔이 공식 인정한 선진국이 된 100년의 시간 동안 아이들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그 사이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끼니를 해결해줘야하는 ‘나약한’ 식구(食口)였던 어린이는 인격을 존중받고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주체가 됐다. 평균적으로는 풍요로워졌고 몸도 커졌지만, 한편으로는 걱정과 불안이 많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1970년대 어린이 사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제공

1970년대 어린이 사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제공

유니세프한국위원회와 중앙일보는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10선’을 선정했다. 앞서 언급한 가상의 어린이 영호와 미루의 일과는 그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유니세프 후원자·시민 설문과 전문가 위원의 심사를 거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것으로 꼽힌 이슈는 ‘스마트폰’의 보급이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상준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자기기 하나가 더해진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장소, 정보습득 창구, 소통의 방식까지 바꾼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0년 경력의 초등학교 교사 임모(56)씨는 “학생들이 책을 보는 집중도가 떨어졌고, 과거 학부모들의 주요 상담이 학업·진로였다면 지금은 스마트폰 관련 고민이 많다. 또래 간 친밀감도 감소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나머지 이슈는 ▶팬데믹 ▶왕따 ▶영유아 메가 히트 콘텐트(이상 사회현상) ▶한국전쟁 ▶조두순 사건 ▶세월호 참사(사건사고) ▶의무교육 ▶아동복지법 ▶유엔아동권리협약(법과 제도)가 선정됐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정병수 아동권리정책팀장은 “아무래도 최근 벌어진 이슈가 더 중요해 보이고, 강한 인상을 준 사건사고에 눈길이 가는 측면은 있지만 아이들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이슈를 빼놓지 않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어린이 ‘안전’ 경각심 일깨운 사회적 재난

[서울=뉴시스] 김명원 기자 = 세월호 참사 8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서울 중구 세월호 기억공간에 시민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22.04.15. kmx1105@newsis.com

[서울=뉴시스] 김명원 기자 = 세월호 참사 8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서울 중구 세월호 기억공간에 시민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22.04.15. kmx1105@newsis.com

스마트폰 외에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 체제로 어린이들의 신체활동을 축소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상 의무 교육이 확대되면서 취학률이 높아지고 학습 격차가 줄었지만, 1990년대 등장한 ‘왕따’는 사회성 발달에 악영향을 주며 사회 문제로 불거졌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어린이는 심리적으로 새롭고 급변하는 것에 대한 반응 속도가 빨라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진단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사건·사고 분야는 어린이 ‘안전’과 ‘처벌강화’에, 법·제도 분야는 어린이 ‘권리’와 ‘복지’에 각각 영향을 줬다. 서울 상계중 2학년 임하준(14)군은 “조두순 사건(2008년)을 알게 된 이후 낯선 남성에 대한 두려움 생겼고 경계하게 됐다”고 했다. 한국전쟁은 전 세계가 한국 어린이들의 구호와 복지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60여 년 뒤의 세월호 사건은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어른들의 무책임을 참담한 심정으로 반성하게 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어린이들에게 사건·사고나 사회적 재난에 대한 트라우마는 어른에 비해 더 크게 남을 수 있다. 어른들이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과 동시에 이를 이겨낼 심리적·신체적 면역력을 길러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어린이 위해 필요한 것?…“어린이 관점 존중”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은 18세 미만 아동의 복지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기틀을 다졌고, 1991년 한국 정부도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 권리’ 개념을 처음으로 확립했다. 어린이들의 복지와 사회적 환경 등은 그동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00주년의 어린이날은 어린이날에 대한 어린이들의 생각을 다시 들어봐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전예린(12)양은 “어린이가 존중받는 날이라서 좋다”고 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박수호(가명·11)군은 “매일 오전 8시 30분에 학교에 가고 끝나면 학원 2개를 간다. 이후에도 공부를 2시간이나 더 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히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어린이의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아동기본법이 만들어져야 하고, 아동 관련 국가 예산의 비중을 키우는 등 공공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남상준 명예교수는 “어린이를 위한 정책을 만들 때도 부모와 선생님이 대신 판단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어린이의 관점과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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