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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사람이 길 됐다” 425㎞ 올레길 첫 완주한 시각장애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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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올레길 자원봉사자들 덕에 희미하게나마 제주의 바람과 파도, 곶자왈 등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길이 된거죠”

시각장애인으로 처음 올레길을 완주한 류청한(52)씨가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완주증서를 받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시각장애인으로 처음 올레길을 완주한 류청한(52)씨가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완주증서를 받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25㎞ 구간의 제주 올레길을 완주한 사례가 나왔다. 2007년 올레길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지 15년 만이다. 주인공은 장애인 동료상담 전문가 류청한(52·남)씨. 류씨는 4일 오후 2시쯤 14-1코스를 마지막으로 올레길을 완주한 후 소회를 밝혔다. 그는 “올레길에서 받은 도움을 자원봉사 네트워크로 확장해 장애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30살 때 시력 대부분 잃었지만

류청한(52) 씨가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명숙 이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류청한(52) 씨가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명숙 이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류씨가 시력을 잃기 시작한 건 20여년 전인 2001년. 재활학을 전공하고 병원에서 작업치료사로 일하던 때였다. 류씨는 “유전적인 요인으로 시력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서른살에 시각의 중심부는 보이지 않게 됐고, 주변부만 뿌옇게 빛을 감지하는 정도로 시력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류씨는 시각장애 1급이 된 후로도 가족상담을 주제로 상담학 석사를, 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동료상담’ 분야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그런 류 씨가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건 우연한 계기였다. 그는 “중도 실명한 후 막연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며 “그러던 중 제주올레에서 ‘한 달 걷기’를 한다는 광고를 접하고 ‘일주일만 걸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남들이 열 걸음 이상 갈 때 나는 한 발자국씩 내디딘다고 생각하고 걸었다”며 “한 코스 두 코스 걷다 보니 힘들지만 걸을 만했다. 생각도 고민도 정리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화산지대, 오름, 외딴섬…쉽지 않은 도전

류청한 씨가 올레길 7-1코스 도전 중 중간 지점인 서귀포시 고근산 정상에서 스탬프를 찍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류청한 씨가 올레길 7-1코스 도전 중 중간 지점인 서귀포시 고근산 정상에서 스탬프를 찍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차분한 설명과는 달리 그의 도전이 쉬운 건 아니었다. 류씨는 “지난해 12월 다른 시각장애인 분들과 함께 자원봉사자 몇분과 2, 3코스를 걸었던 게 기억이 난다”며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바닥이 울퉁불퉁한 너덜바위길과 현무암 지대를 지나고, 오름을 오르거나 절벽을 같은 길을 만날 때도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자고 말릴 때도 있었다”고 했다. 코스 중엔 추자도, 가파도 등 외딴 섬도 포함돼 있다.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기가 여의치 않을 때도 잦았다. 류씨는 “따로 시스템이 갖춰진 게 아니다 보니 사람을 못 구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며 “지인들을 건너고 건너야 했다”고 말했다. 그런 류씨에게 도움을 준 건 ㈔제주올레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거친 전문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는 ‘길동무’ 프로그램이었다. 류씨가 속한 협동조합에서 협조요청을 해 총 26개 코스별로 안내사가 배치돼 동행했다.

10코스에서 올레길을 함께 걸었던 최은정 안내사는 “앞에서 봉사자들이 인솔하면 (류씨가) 등산스틱을 사용해 지형을 파악하고, 소리와 움직임을 파악해 따라오는 식이었다”며 “(류씨의) 체력은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화산지형 등이 어려움으로 작용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류씨는 지난해 6월 시작한 올레길을 1년여 만에 완주했다.

류씨는 “길은 자신과 혼자 대면하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만나 방향을 찾는 기회도 주는 것 같다”며 “올레길을 완주하기까지 많은 자원봉사자의 배려를 받은 만큼 장애인 모두가 저처럼 길을 걷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관계망을 넓히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 ‘길’ 찾도록 네트워크 넓히고 싶어”

 류청한(52) 씨가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명숙 이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류청한(52) 씨가 4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명숙 이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류씨가 찾았다는 ‘방향’은 다른 장애인들도 올레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장애를 얻으면 폐쇄적인 관계를 많이 갖게 된다”며 “장애인들이 ‘함께 걷기’라는 체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원봉사자 등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올레길 중에서도 장애인이 접근하기 쉬운 구간들을 찾겠다”고 말했다. 장애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사회적인 서비스나 시설 등으로 가능하게 한다면 더는 장애가 아니게 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서울연구원 교통시스템연구실에서 초빙연구위원으로도 재직 중인 류씨는 최근 화두인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은 이동 약자를 위한 저상버스가 100% 도입돼 있고, 일본은 연석에 버스 타이어가 달라붙는 기술까지 도입돼 있다”며 “한국은 15년째 저상버스 도입률이 23% 수준이다. 장애인의 입장에 대해 듣고 이해하려는 사회적 배려와 합의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류씨는 이날 오후 5시 30분쯤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과 만나 제주올레 완주증을 받았다. 서 이사장은 류씨에게 “이미 자연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겠지만, 스스로한테 뿌듯하실 것 같다. 대단하다”고 축사를 건넸다. 류씨는 “행복한 사람이 걷는 게 아니라, 걸으니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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