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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초밥십인분과 검찰이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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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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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집에서 출근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오전 8시쯤이었다. 경찰이 만나서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집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알았다고 한 뒤 출근 채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밖에 있던 경찰관과 맞닥뜨렸다. 집에 들어와 압수수색을 하겠다고 했다. 서울동부지방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펼쳐 보였다. ‘컴퓨터 등에 의한 업무방해’가 죄목, ‘전자 기록 장치 일체’가 압수 대상이었다.

흔해진 경찰의 무분별 압수수색 #검찰도 통제에 손놓고 방임해 와 #영장청구권이 검찰 회생 '치트키'

경찰관 네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선 휴대전화(삼성 갤럭시)를 압수했다. 유심칩은 달라고 하니 꺼내줬다. 퍼스널컴퓨터(PC) 하드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아이패드와 맥북은 압수하지 않았다. 잠금 비밀번호 제공 요구에 응하지 않으니 그대로 뒀다. 애플사 기기는 비밀번호를 모르면 가져가도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서랍을 다 뒤졌다. 서류 같은 것밖에 없다며 제지를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압수수색은 네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당연히 출근을 못 했다.

'사라진초밥십인분'이 1등을 한 '재밍' 게임. [재밍 게임 화면 캡처]

'사라진초밥십인분'이 1등을 한 '재밍' 게임. [재밍 게임 화면 캡처]

닉네임 ‘사라진초밥십인분’이 설명한, 지난달 28일 그가 겪은 일이다. 30대 회사원인 그는 지난 대선 직전에 이재명 후보 캠프에서 만든 ‘재밍’ 게임에 참여했다. 9만9999점으로 최고 점수 등록자가 돼 그의 닉네임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화제가 됐다. 2등은 ‘나다짜근엄마’, 5등은 ‘법카쓰고싶다’였다. 이 후보와 부인의 공금 유용 의혹과 가족에 대한 막말 논란을 풍자해 만든 게임용 닉네임들이 재밍 게임 기록 칸에 줄줄이 올랐다.

후보 홍보를 위해 만든 게임인데 후보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표현들이 난무하는 곳이 됐으니 선거 캠프는 난감했을 것이다.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닉네임의 일부만 노출이 되도록 게시판을 바꿨다. 애당초 사용자 반응을 고려하지 않고 게임을 만든 게 잘못이었다. 고소는 실제로 이뤄졌고, 수사가 진행됐다. 대상은 사라진초밥십인분 말고 더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9만9999점은 성실히 게임을 해서 얻은 점수는 아니다. ‘치트키’를 찾아내 단번에 기록한 점수다. 치트키는 프로그램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특정 문자·숫자 조합의 명령어다. 게임사가 실수로, 또는 의도적으로 치트키를 남겨놓으면 게임 하는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찾아낸다. 사라진초밥십인분은 다른 게임에서의 경험을 살려 ‘재밍’에서의 그것을 알아냈다. 자판을 잠시 두들겨 9만9999점을 얻었다. 해킹한 것도, 서버를 교란한 것도 아니었다.

치트키 사용이 게임 제공자에 대한 업무방해에 해당한다면 한 해에 수십만 청년이 처벌받아야 한다. 경찰이 치트키가 뭔지 몰라 마구잡이 수사를 벌인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문제다. ‘재밍’의 서버를 확인해 해킹된 것인지, 교란 공격이 있었던 것인지를 우선 파악하는 게 상식적인 수사 절차다. 그리고 게임의 세계에 대해 좀 아는 사람에게 통상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물어보는 게 먼저다.

언제부터인가 무턱대고 압수수색부터 하는 것이 수사 관행이 됐다. 일단 휴대전화를 빼앗는다. 경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면 검찰이 법원에 청구하고, 법원도 크게 제동을 걸지 않고 내준다. 경찰은 영장 신청을 안 했다고 누군가가 문제를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검사는 경찰에 까다롭게 구는 게 불편해서 압수수색 영장 신청과 청구를 남발한다.

‘검수완박’ 일보 직전에 놓인 검찰은 인권 보호를 위한 사법 통제를 강조하고 있다. 수사에 대한 권한을 대부분 잃어 이제 검찰에 남은 것은 영장청구권 정도다. 헌법에 검사가 하는 것으로 돼 있어 민주당이 그것은 건드리지 못했다. 경찰의 무분별한 수사를 막아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으면 검찰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서울동부지검이 왜 사라진초밥십인분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수용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검찰은 진짜 국민의 편이 돼야 한다. 영장 청구서에 그냥 도장 찍는 존재에게 회생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