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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 종교의 삶을 묻다

“주위에 힘들어하는 이 돕는 그대가 바로 부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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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부처님오신날 천태종 총무원장 무원 스님 인터뷰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지난달 28일 충북 단양의 구인사(救仁寺)로 갔다. 소백산(小白山) 아홉 봉우리 중 제4봉인 수리봉 아래 자리한 사찰이다. 해발 600m의 구인사 절터는 ‘소백산 연화지(蓮花地)’로 통한다. 멀리서 보면 지세가 연꽃 모양이다. 봄에는 영산홍이 만발해 홍련(紅蓮),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 청련(靑蓮), 가을에는 단풍이 고와서 황련(黃蓮), 겨울에는 눈에 싸여서 백련(白蓮)으로 불린다. 오는 8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에서 무원(64) 스님을 만났다. 그는 지난달 취임한 천태종의 신임 총무원장이다.

스승 찾아서 구인사 출가

언제 출가했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다. 출가 전부터 오대산 월정사에 다니면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육조단경(六祖壇經)』 등을 읽었다. 이상하게 다른 건 재미가 없더라. 부처님 마음공부만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건 지루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고1 때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때 출가를 결심했다.”

“마음 하나 잘 쓰는 게 도 닦는 일”
스승이 남긴 화두 출가 내내 궁리

“마음은 공적한데, 왜 상처를 입나”
이치에 맞게 살면 마음도 계속 커

“돈과 명예 있다고 힘 있지 않아”
크든 작든 남 돕는 게 진짜 기쁨

소백산 골짜기다. 그때는 교통도 불편했다. 어떻게 구인사로 출가했나.
“어머니가 두부 공장을 하셨다. 사람들에게 인심이 참 좋으셨다. 제게 ‘소백산 구인사에 산 부처님이 계신다. 거길 꼭 가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전국 사찰을 돌면서 스승을 찾을 생각이었다. 맨 먼저 단양 구인사로 갔다.”
구인사에 왔더니 어땠나.
“‘산 부처님’은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上月, 1911~74) 대조사였다. 이미 열반하신 뒤였다. 그분의 제자인 남대충(천태종 2대 종정) 스님을 만났다. ‘어떻게 왔느냐?’고 하시기에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왔다’고 답했다. 100일 기도를 작정하고 구인사에서 살기 시작했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관세음보살 염불선으로 기도하는 ‘주경야선(晝經夜禪)’을 했다. 기도하다가 삼매(三昧·불교 수행 중 체험하는 공적한 고요)를 체험했다. 49일째 되는 날 출가를 결심했다.”
천태종 신임 총무원장 무원 스님은 “기도를 통해 복을 비는 기복 불교보다 스스로 복을 짓는 작복(作福) 불교가 돼야 한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을 일이 생긴다. 그게 불교의 이치”라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천태종 신임 총무원장 무원 스님은 “기도를 통해 복을 비는 기복 불교보다 스스로 복을 짓는 작복(作福) 불교가 돼야 한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을 일이 생긴다. 그게 불교의 이치”라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출가를 작심한 그는 스승(남대충 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도(道)를 어떻게 닦습니까?” 이 말에 스승은 쉬운 말로 답했다. “마음 하나 잘 쓰는 것이 도를 잘 닦는 것이다.” 어찌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답이다. 그런데도 스승의 답은 그의 가슴에 깊이 내려와 꽂히는 깃발이 됐다. 지금도 무원 스님은 그 깃발을 화두 삼아 살아간다.

‘관세음보살’ 염불하며 수행

그 말이 왜 화두가 됐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주 편안하더라. 낮이건 밤이건 늘 그 생각만 했다. 지금도 일을 하건 기도를 하건 마음 하나 잘 다스리는 게 무엇인고, 끊임없이 참구(參究·꿰뚫어 밝히기 위해 궁리함)하며 산다.”

한국 불교에서 천태종 스님들은 ‘일당백’으로 통한다. 정식 스님이 되기 전의 수련 기간인 행자 생활만 무려 3년이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자는 시간을 줄여서 염불선을 한다. 이걸 통과하지 못하면 출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구인사에는 재가 수행자들이 여름에 1000명, 겨울에 1000명씩 들어와 한 달씩 산다. 하안거와 동안거다. 그들도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한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게 왜 수행이 되나.
“염불은 문을 여는 방편이다. 그 안으로 들면 참선의 경지에 들게 된다. 낮에 농사를 지었으니 몸이 피곤하다. 몸이 피곤하면 자의식이 약해진다. 그 몸을 이끌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30분씩, 1시간씩 부르다 보면 그 말도 끊어진다. 그렇게 삼매에 들어간다. 천태종은 염불선을 통해 공적(空寂) 세계를 체험한다. 그 공적 세계가 이 세상과 우주의 실상이다.”
그걸 체험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세상 경계에 걸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래가 공적 세계이니까.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 말에도 걸리고, 좋다 나쁘다 분별심도 내지 않나. 그런 것에 걸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내 마음은 원래 공적한데, 나는 왜 마음의 상처를 입는가. 이런 물음이 절로 일어난다.”

일이든 기도든 마음을 다해야

구인사 스님들이 가꾸는 배추만 무려 3만 포기다. 가을이 되면 3만 포기 배추를 구인사 경내에 놓고서 치대는 김장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무원 스님은 “천태종에서는 꾀를 부리면 수행의 장애가 된다고 본다. 일이든 기도든 내 마음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한다. 그럼 육체는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 그걸 통해 깨닫는 바가 많다. 공적 세계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나”라며 “사람들은 육체의 살림살이만 신경 쓰고 살지만, 공적 세계를 보고 나면 마음의 살림살이에 초점을 맞추고 살게 된다”고 말했다. 이 말끝에 무원 스님은 “자신의 마음을 자꾸 키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떡해야 자꾸 마음을 키우며 살게 되나.
“마음을 잘 쓰면 마음이 큰다. 매사에 이 일이 이치에 맞는가, 안 맞는가 따져 보라. 공과 사도 그렇게 따져 보라. 무슨 일이든 이치에 맞는 쪽으로, 사심(私心)보다 공심(公心)을 택하다 보면 마음은 자꾸 커지게 된다. 큰마음이 될수록 공적 세계에 더 가까워진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처로 살려면 어떡해야 하나.
“주위를 돌아보라.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작든 크든, 그들을 도와주면 된다. 그게 보살이고 부처다. 그렇게 도와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그게 법열(法悅·이치를 깨달을 때 느끼는 희열)이고 선열(禪悅)이다.”
그렇게 기쁨을 느끼면 어찌 되나.
“기쁨을 느끼면 내 마음이 개운해진다. 동시에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힘이 생긴다.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의 힘을 키우는 거다. 돈 있고 명예가 있다고 힘이 있는 게 아니다. 마음에 힘이 생겨야 진짜 힘이 있는 거다. 그 힘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지 않나.”

인터뷰가 끝나고 구인사 경내로 나섰다. 파릇파릇한 신록이 산줄기를 타고서 파도처럼 흘렀다. 소백산의 봄은 청정했다. 산보다 더 푸른 가람(伽藍)이 그 속에 있었다. 오가는 신자들의 인사를 합장으로 받으며 무원 스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마음 하나 잘 쓰는 게 도 닦는 일이죠.”

한국 천태종 다시 일으킨 상월 대조사

천태종의 종조는 중국의 천태지자(538~597) 대사다. 천태산은 원래 도교의 성지였으나 지자 대사가 머무른 이후에 천태종의 본산이 됐다. 지자 대사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 불교를 선과 교를 아우르는 불교로 통일시켰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쳤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한국 천태종의 개창조(開創祖)로 불린다. 고려 문종의 왕자로 태어난 의천은 개성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요나라와 송나라로 유학해 여러 불교 종파와 교류했다. 천태산에서 천태 교학을 익힌 의천은 고려로 귀국할 때 불교 서적 3000권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대각국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태종을 열었다.

상월(1911~74) 조사는 천태종의 중창조(重創祖)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의 속명은 박준동이다. 출가 후에 용맹정진 수행을 하다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구인사를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