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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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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동서대 석좌교수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동서대 석좌교수

‘아이 보채듯 한다’는 말이 있다. 남을 귀찮게 할 때 쓰는 말이다. ‘철딱서니 없는 애도 아니고…’란 말도 있다. 철없는 사람을 이른다. 아이는 언제나 떼나 쓰고 철없는 존재일까. 가족이 봄나들이를 떠났다. 꽃들 사이를 윙윙거리며 춤추는 벌을 보고 딸이 소리친다. “아빠, 벌이다. 벌!” 마침 하늘로 날아가는 벌을 보고 아빠가 말했다. “너, 저 벌이 어디로 날아간 줄 아니? 꿀 따러 가는 거야 꿀!” 딸이 대꾸한다. “아냐, 아빠! 저 벌은 엄마를 찾아가는 거야.”

영국의 국민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일찍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고 읊었다. 스승도 아니고 아버지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은근히 어린이들을 깔본다. ‘주린이’란 주식과 어린이를 합친 말이다. 주식 투자 초보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어른이’란 말도 있다. 어른과 어린이를 합친 말이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장난감 따위에 열광하는 사람을 이른다. 꼭지가 떨 떨어진 사람을 향한 조롱이 담겨있다.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어린이를 내려다보는 시선 여전
어린이는 언제나 ‘어른의 아버지’
아이들 존중하고 희망 싹틔워야

어린이란 말은 소파 방정환 선생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아이들을 낮춰 부르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었다. 선생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이란 의미로 이 말을 썼다. 100년 전의 일이다. 선생은 간곡히 호소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 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遠足·소풍) 같은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언문)

이 선언문이 발표된 때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나라를 잃은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한복판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목구멍에 풀칠하기 바빴다. 이런 때 선생은 어린이에게서 이 나라의 희망을 봤다. 선생이 위대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지난달 30일 기부천사 이영애씨는 소아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앰뷸런스 소원재단(Ambulance Wish Foundation)’에 1억원을 기부했다. 사단법인 하이패밀리 이사장인 우창록 변호사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배고프고 가난한 우리나라가 어느새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네 아이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일까. 아이들은 더 굶주리고 아파한다. 어서 아이들이 행복하고 밝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의 말이 뼈아프게 들렸다. ‘흉년에 어미는 굶어 죽고 아이는 배 터져 죽는다’는 부모 사랑은 옛말이 됐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로 스러져가는 생명이 끝없다. 전쟁통도 아닌데 해외 입양은 계속된다. 거기다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다.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김수정·정익중 교수의 연구를 보면 아동학대에 따른 한국사회의 사회·경제 비용이 최소 3899억원, 최대 76조원으로 나타났다. 76조원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5.1%나 되는 규모다. 엄청난 사회 비용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곳곳에서 아동복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렇게 해서 복지비를 늘리면 무너진 가정이 살아나고 희망을 다시 싹틔울 수 있을까.

정부는 2006년 이후로 출산 장려금만 200조원 넘게 집행했다. 그런데도 지난해 출산율은 0.84명으로 떨어졌다. 이런 때에 출산(出産)이 옳으니 출생(出生)이 옳으니 한가한 말다툼이나 하고 있다. 그래서 출산을 출생으로 바꾸면 아이들이 얼씨구나 하고 얼굴을 내밀까.

한국을 넘어서 보면 지금 지구촌에서 어린이들은 빈곤과 기아로 죽어간다. 에티오피아에서는 5세 이하 어린 생명이 하루에 자그마치 643명이 죽음을 맞는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전쟁으로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피를 흘리고 있다. 어른들의 탐욕 탓이다.

1954년 유엔은 어린이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계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매년 11월 20일이 기념일이다. 지난해 세계 어린이날 필자가 담임목사로 있는 청란교회 어린이들과 함께 ‘세계아동 인권조약’을 찾아 읽었다. 당시 함께한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호소했다.

①때리지 마세요. ②싸우지 마세요. ③소리치지 마세요. ④차별하지 마세요. ⑤안아주세요. ⑥놀아주세요. ⑦끝까지 들어주세요. ⑧쉴 시간이 필요해요. ⑨나를 존중해주세요. ⑩약속은 꼭 지켜주세요.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주 부끄러웠다. 비로소 어린이날이 ‘부끄러운 어른들의 날’이 됐음을 깨달았다. 오늘 전국 곳곳에서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란 어린이날 노래가 불릴 것이다. 이 노래가 365일 들리는 세상을 보고 싶다. 5월 5일 하루를 어른의 날로 삼고, 364일을 어린이날로 바꿀 수는 없을까. 내 손녀를 가슴에 꼭 품고 해 본 생각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