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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 '낙태권' 판결문 초안 샜다…"11월 중간선거 흔들 듯"

중앙일보

입력

낙태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에서 보수 성향 대법관 6명을 얼굴 사진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낙태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에서 보수 성향 대법관 6명을 얼굴 사진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연방 대법관 다수가 헌법상 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Roe v. Wade)' 판례를 뒤집는 데 찬성했음을 시사하는 판결문 초안이 유출됐다. 미국 현대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은 개인의 기본적 권리 침해라며 그 내용을 비판했고, 공화당은 문건이 유출됐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사법 독립 훼손을 지적했다. 미국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중요 기준 중 하나인 낙태 문제가 법원 울타리를 넘어 장외 싸움으로 번지면서 오는 11월 중간선거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연방 대법원은 3일(현지시간) 보도자료를 내고 "어제 한 언론사가 계류 중인 사건에 대한 의견서 초안 사본을 보도했다"면서 "보도에 기술된 문서는 진본이지만, 그것은 사건 쟁점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나 어느 구성원의 최종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법관들은 사건을 심리하면서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의견 초안을 작성해 내부에서 회람한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틀렸다"…"9명 중 5명 낙태 반대"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날 연방 대법원이 낙태 권리를 합법화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다수 의견서 초안'을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판례 무효화 입장인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해 지난 2월 동료 대법관들에게 보낸 98쪽짜리 문건이다. '법원 의견서(Opinion of the Court)'라는 제목의 문건 상단에 '1차 초안(first draft)'이라고 적혀 있다.

폴리티코는 법원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해 12월 구두 변론을 청취한 뒤 연 회의에서 공화당 정부가 임명한 클래런스 토머스, 닐 골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까지 4명의 대법관이 얼리토 대법관과 같은 쪽에 투표했다고 전했다. 존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을 제외하고도 9명 중 5명이 판례 무효화를 지지한 것이다.

얼리토 대법관은 의견서에 "로(대 웨이드)는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틀렸다"면서 해당 판례를 "무효로 해야 한다(overrule)"고 적었다. 또 "이제는 헌법을 준수하고 낙태 문제를 국민의 선출된 대표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고 썼다. 낙태 권리를 연방 차원의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지 않고 개별 주가 판단해 규제해야 한다는 게 보수 진영 주장이다.

"판결문 초안 유출은 전례 없는 일" 

연방 대법원은 회기를 마치는 6월 말 또는 7월 초 최종 판결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 시점을 두 달여 앞두고 누군가 대법원 내 동향을 유출한 것이다. 폴리티코는 대법관들이 최종 판결 전 의견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는 설명을 달았지만, 1973년 연방 판례로 확립된 낙태권을 49년 만에 다시 무효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결정이어서 미국 사회에 파장을 몰고 왔다.

연방 대법원 판결문 초안이 외부에 유출된 것은 미국 현대 사법 사상 전례 없는 일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존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은 성명을 통해 "법원의 신뢰에 대한 배신이 우리 업무의 무결성을 훼손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법원의 업무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일(현지시간)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을 방문해 경영진과 대화했다.[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일(현지시간)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을 방문해 경영진과 대화했다.[로이터=연합뉴스]

바이든 "낙태 찬성 공직자 뽑아라"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판결문 초안 유출 행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채 알려진 판결 내용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로(대 웨이드)는 매우 개인적인 결정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대항하는 수정헌법 14조의 개인적 자유라는 개념을 인정한 여러 선례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로는 거의 50년 동안 이 땅의 법이었고, 법의 기본적 공정성과 안정성은 (판례를) 뒤집지 말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만약 법원이 로(대 웨이드)를 뒤집는다면 여성의 선택권을 보호하는 임무는 이 나라 모든 선출직 공무원에게 달리게 된다"면서 "오는 11월 낙태에 찬성하는 공직자를 뽑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 의견을 피력하고 예상 결과를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로(대 웨이드) 결정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매우 급진적인 결정"이라면서 낙태권을 시작으로 동성 결혼, 피임 등 다른 사생활 권리도 침해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3일(현지시간) 대법원 판결문 초안 유출은 사법 독립 훼손이라고 비판했다. [AP=연합뉴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3일(현지시간) 대법원 판결문 초안 유출은 사법 독립 훼손이라고 비판했다. [AP=연합뉴스]

공화당 "결과 바꾸려는 부당한 압력 행사" 

공화당은 문건 유출은 "사법 독립 훼손"이라고 비판했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대법관들이 사건을 심리하는 동안 내부 초안이 대중에게 유출된 것은 현대사에 없었다”면서 "누구든 무법 행위를 한 사람은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매코널 원내대표는 판결문 초안 유출은 법원 내부 누군가가 "결과를 바꾸기 위해 부당한 압력을 조장하려는 노력"이라고 피력했다. 공화당 임명 6명, 민주당 임명 3명으로 보수 우위인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려 하자 이를 공개해 법원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로 봤다. 사실상 민주당 측을 문건 유출 배후로 지목한 셈이다.

반면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힐 경우에 대비해 공화당이 정치적 충격을 완화하려는 시도로 문건을 유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은 문건 유출 경위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CBS는 연방수사국(FBI) 등이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낙태 권리 정치 쟁점화는 민주당에 유리 

미국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의 하나인 낙태 권리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오는 11월 중간선거까지 여파가 지속할 수 있으며, 선거 결과도 흔들 수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예상했다. 지금까지는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이었던 중간선거가 이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 선택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현재 공화당에 유리한 지지율 격차를 좁히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40년래 최고를 기록한 인플레이션과 남부 국경 불법 이민자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42%대에 머물고 있다. 반면, 워싱턴포스트-ABC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54%는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유지해 낙태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판례를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28%에 그쳤다.

낙태 권리를 정치 쟁점화하면 유리한 쪽은 민주당이다. 실제로 민주당과 시민운동가들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진보 성향 및 무소속 유권자들에게 집결의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낙태 옹호 운동가를 인용해 "판례를 뒤집으려는 대법원 결정이 유출됐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고무돼 있다"고 전했다. 이날 워싱턴DC 연방 대법원 청사 앞을 비롯해 미국 주요 도시에서 낙태 지지 시위가 계획됐다. 진보 성향 단체들은 예상 액수의 두 배 이상 자금을 모금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판례 뒤집히면? 주마다 제각각 결정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최종 결정하면 미국 내 50개 주는 낙태 절차의 합법 여부를 제각각 결정하게 된다. 미 공영방송 NPR은 낙태권 옹호 단체를 인용해 '로 대 웨이드'가 무효로 되면 20개 이상 주에서 즉각 낙태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낙태를 원하거나 필요한 여성은 낙태가 합법인 주로 이동해 시술 받을 수는 있으나 특히 소득이 적고 시간이 부족한 저소득층 여성의 피해가 클 것이라고 낙태 옹호 단체들은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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