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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막의 종교는 오로지 유일신인가…최고 성서신학자의 답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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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인가, 아니면 초월성인가.”

#풍경1

정양모 신부는 올해 87세입니다.
‘성서 신학의 최고 권위자’를 꼽으라면
학계에서는 다들
가톨릭의 정양모 신부를 꼽습니다.

정양모 신부가 8일 오후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 20220408

정양모 신부가 8일 오후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 20220408

성경을 바라보는
정 신부의 안목과 해석은
깊고도 탄탄합니다.

그는 외국어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는 물론이고
예수님이 일상생활에서 썼던 언어인
아람어와 히브리어,
당시의 외교용 언어였던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3년, 독일에서 7년간
공부한 이력이 바탕에 있습니다.

정양모 신부와 인터뷰를 하는 날은
참 즐거운 날입니다.

평범한 점퍼 차림에
늘 수수한 모습이지만,
질문에 답을 할 때는
깊은 눈으로 길어올린
울림과 날카로움이
인터뷰 공간을 가득 채우니까요.
저는 그 여운이 좋습니다.

정양모 신부가 25일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정양모 신부가 25일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풍경2

그렇다고 정양모 신부를
교리와 학설, 이론으로만
무장된 신학자로 본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는 15년 넘게 다석학회 회장을 맡으며
‘기독교 도인’으로 불리던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의 영성을
좇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 신부의 안목은
여러모로 각별합니다.

저는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종교는 무엇인가?”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만난 정양모 신부는 "종교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만난 정양모 신부는 "종교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종교학자에게 ‘첫 단추’를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두 번째 질문도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정 신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모든 동물은 먹거리에 탐닉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게 참 이상하다고도 했습니다.

  “인간은 의식주를 넘어서는
   초월의 세계를 찾는다.
   그게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성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걸 너무나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성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인간은 철들자마자
절망하고 맙니다.

정양모 신부는 "인간은 의식주를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를 찾는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양모 신부는 "인간은 의식주를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를 찾는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그래서 뒤꿈치를 듭니다.
처음에는 살짝,
그다음에는껑충껑충 듭니다.
죽음이라는 담장,
그 너머를
보려고 애를 씁니다.
무진장 애를 씁니다.

정양모 신부는 그게 바로
‘초월성’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지상에 출현한 연대를 두고
   여러 학설이 있다.
   대략 40만 년 전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흑인이 출현했다는 게
   공통적 학설이다.
   그게 우리의 원조다.
   소위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이 붙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이상하게도 이 동물은
   의식주에 만족하지 않고
   초월자 혹은 초월성을 찾는다.
   종교는 거기서 생겨났다.”

정양모 신부가 자택의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양모 신부가 자택의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일목요연했습니다.
   인류가 왜 종교를 필요로 하는지,
   인류사에 왜 종교가 등장했는지 말입니다.

#풍경3

그래도 의문은 남더군요.
그럼 왜 유일신일까.
그리스도교는 왜 초월자를 찾고,
불교는 왜 초월성을 찾는 걸까.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요.

이에 대한 정양모 신부의 답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동시에 뜻밖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리적 풍토가 종교의 성격을
   결정하더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궁금했습니다.
지리적 풍토에 따라
초월자인가, 아니면 초월성인가가
결정된다니 말입니다.

정양모 신부는 "유일신 종교는 사막에서 태어났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그렇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양모 신부는 "유일신 종교는 사막에서 태어났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그렇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 신부의 설명을 하나씩 들으며
저의 고개도 조금씩
끄덕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유일신 종교는 사막에서 태어났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모두 중동에서 태동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일신의 계시를 받는
   계시 종교다.”

아시아의 평원에서 태어난 종교는
이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평원에서 태어난 불교와 도교, 유교 등은
   초월자가 아닌 초월성을 찾는다.
   이러한 평원 종교는 인생에 대한 이치와
   법칙을 찾아 나서는 이법(理法) 종교다.”

왜 그런가, 저는 둘의 차이를 물었습니다.
초월자와 초월성, 왜 그렇게 갈라지는지 말입니다.

  “사막은 메마른 곳이다.
   사람이 살기가 참 어렵다.
   스스로 인생을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초월자를 찾게 된다.
   그 초월자는 유일신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일신에게 가는 길도 한 길뿐이다.”

정양모 신부는 "황량한 사막에서 살려면 오아시스를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양모 신부는 "황량한 사막에서 살려면 오아시스를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왜 한 길뿐인가,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사막의 풍토를 보라.
   광활한 사막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아시스뿐이다.
   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 하나뿐이다.
   그러니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겠나.
   생명을 주시는 분이니까.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려보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
그 위로 작열하는 태양,
생명의 자취가 거의 없는 삭막함,
그 안에 찍힌 딱 하나의 점.
오아시스.
물이 솟는 곳.
생명이 솟는 곳.
나를 살리는 곳.
내가 살 수 있는 곳.
가야만 하는 곳.
살기 위해서 매달려야 하는 곳.

정양모 신부가 제게 물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이 뭔지 아는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저에게 정 신부는
“그게 대상(隊商)의 길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양모 신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선이 바로 생명의 길이다"고 했다. [중앙포토]

정양모 신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선이 바로 생명의 길이다"고 했다. [중앙포토]

낙타의 등에 짐을 잔뜩 싣고
사막의 모래언덕 위를 줄지어 이동하는
사막 상단의 길입니다.
그 길이 점에서 점으로 연결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 점이 바로 오아시스입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이 길을 벗어나면 어찌 되겠나.
  죽음뿐이다.
  그래서 길은 하나다.
  오아시스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다.”

  그래서 초월자도 한 분,
  초월자에게 인도하는 구세주도 한 분,
  예언자도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 신부의 해석을 들으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서 신학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는데도,
  교리적인 틀이나 학문적인 뻔함에 갇히지 않고
  역사와 지구와 인간을 꿰뚫어가며
  자신만의 통찰을 내놓는 그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풍경4

저는 마지막 남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럼 아시아의 평원에서 태동한 종교는
   왜 초월자가 아닌 초월성을 찾나?”

정 신부는 차분하게 답을 이어갔습니다.

  “평야에서는 사람이 사막처럼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먹거리가 풍부하다.
   강도 있고 마실 물도 넉넉하다.
   사람이 살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초월자인 유일신을
   찾아 나서지 않고,
   초월성의 진리를 찾아 나서더라.”

정양모 신부는 "인간은 먹거리에 만족하지 않고, 특이하게 초월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양모 신부는 "인간은 먹거리에 만족하지 않고, 특이하게 초월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자연이 내뱉는 숨을 인간이 들이마시고,
  인간이 내뱉는 숨을 종교가 들이마시고,
  종교가 내뱉는 숨을 다시,
  우주가 들이마시는구나.

이런 맥락에
어떤 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어떤 분은 고개를 저을 수도 있습니다.

초월자가 맞다,
아니다 초월성이맞다며
거세게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방점은 초월자나 초월성이 아니라
‘초월’에 찍힌다고 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없이 계신 하느님”이란
표현을 종종 썼습니다.
정양모 신부는 그 표현을 예로 들며 말했습니다.

  “절대 초월자는 우리 마음에 내재해 계신다.
   여기서는 초월자와 초월성이
양분돼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통일돼 있다.”

결국 사막이냐, 평원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초월적 지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방점을 찍을 곳은
바로 거기가 아닐까요.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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