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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공수 뒤바뀐 청문회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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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의 공직 후보자 부적격 기준이 새로워졌다. 5년 전 집권 당시에는 위장 전입·병역기피·탈세·표절·투기·성범죄·음주운전 등 7대 기준을 내세웠다. 민주당이 이번에 윤석열 정부의 총리·장관 후보자에게 요구한 ‘10대 비리 의혹 체크리스트’의 기준은 사뭇 다르다.

민주당, 공직 후보자 검증 기준 강화 #거짓말·허위답변·전관 등 엄격해져 #공정 중시하는 최근 사회 흐름 반영

10대 기준은 찬스 특혜(가족·기업·셀프), 부동산 등 재산증식, 탈세 및 업무추진비 논란, 전관예우 비리, 막말과 갑질, 능력·자질 등 도덕성, 병역 비리, 거짓말·허위답변·자료제출 거부다. 기준을 고무줄처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문재인 정부의 7대 기준으로 공격하려니 한 방이라 할 만한 의혹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 정부의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을 지켜본 국민에게 똑같은 잣대로 새 정부의 장관 후보자를 공격하는 건 민망했을 터다. 2000년 인사청문회가 처음 도입된 뒤 문 정부만큼 부적격 후보자가 많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윤석열 정부의 공직 후보자 의혹을 정리한 '10대 비리의혹 체크리스트'를 들어보이고 있다. 뉴시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윤석열 정부의 공직 후보자 의혹을 정리한 '10대 비리의혹 체크리스트'를 들어보이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민주당이 기준을 확 바꾼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이번에 제시한 10대 기준의 키워드는 공정과 상식이 아닌가 싶다. 여기엔 조국 전 서울대 교수의 자녀 입시 불공정이 드러낸 부조리와 엘리트 카르텔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잣대로 보면 이번에 민주당의 표적은 두 명 정도로 보인다. 가족 4명 모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휩쓸어 간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자진사퇴했고, 자녀의 진로와 관련해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는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그런 경우다. 이들을 제외하면 다른 후보자들은 한 방이라 할 만한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재산증식은 내로남불이 되어선 안 된다. 누구나 부(富)를 추구할 수 있다. 재산이든, 연봉이든 탈법이 없다면 문제될 게 없다.

민주당은 어땠나 보자.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2018년 서울 흑석동 재개발 예정지의 상가 주택을 25억7000만원에 매입했다. 당시 현직 청와대 대변인으로 10억원 넘는 대출을 받고, 관사에 입주하는 ‘주(住)테크’까지 벌였다는 의혹이 나왔다. 국민적 공분이 들끓자 사퇴하고 이듬해 주택을 팔아 시세차익 8억8000만원을 거머쥐었다. 그는 여전히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도 탈세와 절세, 투자와 투기의 경계는 모호하다. 마찬가지로 로펌에서 거액 연봉을 받아도 전관예우가 없었다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이 국민을 대표해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것은 열 번째 비리 항목으로 꼽은 거짓말·허위답변·자료제출 거부다. 물론 이 기준을 민주당에 적용하면 자유로웠을 사람이 많지 않다. 문 정부가 공직 후보자 34명을 야당 동의 없이 임명했을 때 민주당이 감싸고 돌았던 후보자들이 거듭 저질렀던 방식이다. 5년 만에 입장이 바뀌자 새 정부에 이 잣대를 들이대면 내로남불이다. 그렇긴 해도 이제 절차적 공정성은 우리 사회 최고의 사회적 규범이 됐다. 능력껏 재산을 불리는 것이야 여야 막론하고 다를 것 없다고 쳐도 의혹을 뭉개는 건 국민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최소한 절차적 공정성은 지키라는 게 국민의 소박한 요구다.

5년 만에 공수(攻守)가 뒤바뀐 청문회는 구태정치의 여전함을 드러냈다. 민주당이 5년 전 부적격자를 읍참마속(泣斬馬謖)했다면 당당히 문제점을 지적했을 텐데 자승자박이 됐기 때문이다. 국민의 실망도 크다. 오죽하면 2010년 SBS 정치 드라마 ‘대물’의 대사가 최근 SNS에 역주행되고 있을까. 고현정의 대사를 옮겨보자. “한국 국회 개원한 지 60년 넘었습니다. 꿈을 품고 국회에 들어와 뛰어도 구태의연한 정치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당 지도부 눈치 보는 불행한 현실에서 세대교체 돼도 의안이 날치기되는 비극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정치인은 나라의 장래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말 안 듣는 정치인에게 사랑의 회초리를 들어주세요.”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