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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일 역사 화해 5개년 계획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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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유하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

박유하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

곧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다. 동아시아 평화를 바라는 필자는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최악이 된 한·일 관계를 새 대통령이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동안 한·일 관계에는 보수가, 남북 관계에는 진보가 열심이었지만 이 두 관계는 연관돼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인식한 대통령이었다. 실제로 김대중 시대엔 남북관계도 한·일관계도 최고조였다.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적대도 굴종도 아닌 호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진보뿐 아니라 보수 정부 대통령들도 한·일 관계 관리에 실패한 원인은 일본에 대한 지식 부족과 그에 따른 판단 오류에 있었다. 화이트 리스트 수출 규제 이후 일본에 대한 적대 정책도 문 정부와 가까웠던 학자들의 잘못된 진단이 초래했다. 일본의 규제가 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본의 의도 때문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언론도 정부도 이런 황당한 주장에 휘둘렸다.

문재인 정부 5년 양국 관계 최악
민관 시스템 가동, 안정적 관리를

한·일 관계 악화 저변에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있다. 1991년 최초의 위안부 증언 이후 사반세기만인 2015년 12월 당시 박근혜 정부가 어렵게 달성한 ‘한·일 합의’에 따라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을 문재인 정부가 해산하면서 일본의 의구심은 불신으로 굳어졌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부인한 2018년의 한국 대법원의 징용 판결은 일본 민간 차원까지 불신을 키웠다. 문 정부는 그제야 판결에 거리를 뒀지만, 사태 수습이 가능한 시간은 이미 지난 뒤였다.

관계 회복과 문제 해결에는 의지만이 아니라 쟁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꼬여버린 구조와 원인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쉬운 해결을 성급하게 도모하기보다는 역사 문제를 제대로 검증하고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장기적 시스템 구축을 제안한다. 과거에 한·일 양국은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학자들만의 밀실 토론을 넘어선 공간이 필요하다.

10년 전엔 한·일 양국 정부가 징용자 명부를 반환하고 피해자 위령 행사를 하는 등 교류하고 협력했다. 그런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면 양국이 공동으로 연구하고 사업하고 공통 교재 만들기도 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을 지향하되 시간을 충분히 두고 역사 문제에 대한 이해를 국민도 함께 쌓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양국 언론의 참여도 필요하다.

한·일 합의가 지원 단체의 비난만으로 좌초된 것은 사태에 대한 국민의 이해가 깊어지기 전에 갑자기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일 합의의 중심은 ‘사죄와 보상’이었다.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말도 일본이 되돌리는 일이 없도록 한국 쪽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가 소녀상 철거 협력이라는 말만 부각하는 바람에 정작 더 중요한 핵심이 가려졌다. 1990년대 후반 일본 총리의 사죄 편지글을 들으면서 울었던 할머니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문 정부 5년 동안 27명이 작고해 이제 11명 남았다.

지원 단체와 문 정부가 주장해 온 법적 책임이란 연구가 아직 불충분했던 시대에 도출된 주장이다. 법적 책임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도 아니다. 1990년대 다수가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일본 국민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일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제 위안부 운동의 실패도 돌아봐야 한다. 지원 단체들의 목소리에 가려 당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역사 문제에 안정적으로 대응 가능한 민관 시스템이 가동된다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양국 정부가 대립하지 않아도 된다. ‘역사 화해 5개년 계획’이라도 만들어 5년마다 성과를 점검하면서 50년이든 100년이든 운용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 화해를 구성원 스스로가 이루겠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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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