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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글로벌 한국 현대미술의 자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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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2018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국내 최초의 ‘개방형 수장고’다. 유리창을 통해 2층 수장고 내부를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1층과 3층 수장고는 안으로 직접 들어가 미술품을 관람할 수도 있다. 폐쇄된 공간이었던 수장고를 관람객과 공유함으로써 ‘열린’ 미술관을 표방한 것이다.

이곳 5층 기획전시실에 마련된 ‘미술로, 세계로’전(6월 12일까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수집한 해외미술품 총 668점 가운데 현재까지 미공개된 작품을 중심으로 96명 작가들의 조각·회화·판화 104점을 전시하고 있다. 화풍이나 화파, 혹은 작품 제작 시기에 따라 구성되는 여타 미술관들의 전시와 달리 ‘미술로, 세계로’전은 ‘수집’ 시기에 따라 구성됐으며, 작품 설명문에 기증자 이름과 기증 시기, 구입 시기를 명시해 수집의 경로를 드러냈다.

청주분관 ‘미술로, 세계로’전
미공개 해외미술 수집품 나와
한국미술의 또다른 성장 증언
‘내부로부터의 글로벌’ 보여줘

요제프 보이스 ‘보이스와 백의 카드’의 세부, 트럼프카드, 콜라주, 1989년 원화랑 기증.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요제프 보이스 ‘보이스와 백의 카드’의 세부, 트럼프카드, 콜라주, 1989년 원화랑 기증.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해외미술품 수장에 초석이 됐던 88서울올림픽의 역할에 주목한다. 국고 90억원을 들여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올림픽조각공원을 조성하고 1987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국제야외조각전’을 열어 공산권과 아프리카·중동 등 다양한 국적의 작품을 올림픽공원에 영구 설치하도록 했다. 158명의 국내·국외 미술가가 참여했던 ‘국제 현대회화전’은 작가들에게 출품작 외에 한 점을 더 제작해 미술관에 기증하도록 독려했다. 행사 준비과정에서 민중미술과 한국화 계열이 배제되면서 편파적 운영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으나 이를 통해 기증받은 101점의 조각과 회화는 해외 수장품의 토대가 됐다. 101점 가운데 전시에 출품된 29점은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수장고를 벗어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헝가리 작가 죄지르 요바노비치의 ‘경주로 가자’, 영국 나이젤 홀의 ‘한강’은 작가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을 석고와 시멘트, 철을 이용해 제작한 아름다운 추상 조각이다.

1980년대 민간 차원 미술 교류의 중심에는 현대미술관회가 있었다.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해 유력한 기업인이 포함되기도 했으나 이들은 지명도 높은 해외작가를 섭외해 강연회를 여는가 하면, 영국의 대표적 팝아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사진 콜라주 ‘레일이 있는 그랜드 캐니언 남쪽 끝’을 비롯해 고가의 작품 6점을 구매해 미술관에 기증했다.

개인 자격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백남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87년 앤디 워홀의 ‘자화상’ 2점, 세계적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야바체프의 ‘계곡 장막’의 구입을 주선했으며,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의 유치,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도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전시에 출품된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 세 점은 1986년 보이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절친을 잃은 슬픔에 백남준이 서울의 원화랑과 기획했던 회고전에 출품됐던 작품들이다. ‘보이스와 백의 카드’는 뒷면에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의 흑백사진이 인화된 트럼프를 배열한 것으로, 1963년 백남준의 전시회에 돌연 등장해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펼쳤던 보이스의 모습이 사진첩처럼 찍혀 있다.

1990년대에는 붕괴된 냉전 구도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도 점차 글로벌 미술계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해외작품의 수집 경로도 다변화했다. 1991년부터 전면화된 미술품 수입 개방정책으로 미술품도 상품처럼 국경을 넘나들게 되면서 해외 현대미술의 동향이 실시간으로 국내에 전해졌다. 1993년 대전엑스포와 1995년 광주비엔날레 등 국가 차원의 행사 외에 현대화랑·선화랑 등 사립 갤러리들이 유명 작가의 전시를 유치하고 작품을 판매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존 케이지·바바라 블룸·백남준 등 21명의 작가들이 참가한 ‘레디메이디 부메랑’ 판화집을 구입하는 등 1990년대에는 6억원 이상 책정된 수집예산을 바탕으로 기증이 아닌 ‘구입’을 통해 수장품의 수준을 높여갔다.

‘미술로, 세계로’전이 드러낸 해외미술품 소장을 위한 자발적 노력은, 서구 현대미술과의 소통 속에서 이를 토착화시켜 ‘내부로부터의 글로벌화’를 이뤄나가고자 했던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어렵게 수집했으나 수장고에 갇혀 있던 미술품들을 발굴해 개방한 것은 소장품이 더 이상 미술관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리는 민주화된 미술관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귀한 작품들을 연구하고 활용해 빛을 더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