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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수 있었던 시레토코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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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동쪽 끝 시레토코(知床)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다. 시레토코란 지명은 아이누어로 ‘땅이 끝나는 곳’이란 의미라는데, 정말 세상의 끝에서나 만날 수 있을 듯한 신비로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여행으로 두 번 이곳에 갔지만, 그 아름답다는 가슈니 폭포와 야생곰을 만날 수 있는 유람선은 타 보지 못했다. 시간이 맞지 않거나, 날씨가 좋지 않아서였다.

지난달 23일 일어난 시레토코 유람선 침몰 사고 속보를 처음 봤을 때 이곳의 거친 바다가 떠올랐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무선 연락 후 유람선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구조 소식이 전해질 거라 생각했다. 일본이 안전 문제에선, 더구나 해양 안전에선 워낙 철저한 나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전개는 충격이었다. 배에 탔던 승객과 승조원 26명 중 14명이 사망한 채 발견됐고 열흘이 지나도록 12명이 실종 상태다. 선체도 사고 일주일이 지난 지난달 30일에야 찾을 수 있었다.

지난달 29일, 헬기가 홋카이도 시레토코 인근 유람선 침몰 현장을 수색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9일, 헬기가 홋카이도 시레토코 인근 유람선 침몰 현장을 수색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사가 진행될수록 이번 사고가 인재(人災)였다는 사실은 분명해지고 있다. 사고 당일 아침부터 강풍·파랑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지만 유람선은 출항을 감행했다. ‘상황이 안 좋으면 돌아오는’ 조건부였다고 한다. 선박업체와 유람선 간 무선 연락을 주고받는 안테나도 몇 달째 파손된 상태였고 선내 위성전화는 고장 났다. 사고가 난 배가 직접 회사와 연락을 못 해 다른 회사를 거쳐야 했다. 매일 험한 파도 한가운데로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배였지만 안전 관리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관광객이 줄어들어 유람선 회사의 적자가 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테랑 선장들은 해고돼 초보 선장들이 배를 몰아야 했다. 그래선지 사고 선박은 작년 5월과 올해 두 차례나 좌초 사고를 냈다. 사고 선박 회사의 사장이 사고 후 닷새가 지나서야 공식 회견을 한 것도 놀라웠다. “죄송하다”며 도게자(土下座·땅에 머리를 대고 엎드림)를 했지만 “출항을 하겠단 최종 결정은 선장이 했다”는 말로 책임을 떠넘겼다.

시레토코는 일본인도 접근이 쉽지 않은 관광지다. 평생을 고생하셨다며 아들에게 홋카이도 여행을 선물 받은 노부부, 결혼 프러포즈를 위해 유람선을 탄 20대 커플 등 희생자들의 사연이 하나같이 극적인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 닥친 이번 비극은 사고 원인도 대처 과정도 그동안 알던 일본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라 더 황망하다. 일본의 어떤 신화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