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밖에 얻지 못해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 지위를 상실했다.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도 115석으로 한나라당(133석)에 크게 밀렸다. 어쩔수 없이 김대중(DJ) 대통령은 국회 주도권을 쥐기 위해 총선 전에 깨졌던 DJP 공조를 복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는 공조 복원의 조건으로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새천년민주당은 자민련과 손잡고 그해 7월 국회 운영위에서 교섭단체 요건을 ‘20석 이상’에서 ‘10석 이상’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만섭 국회의장은 DJ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개정안 본회의 직권상정을 거부하는 바람에 JP의 욕심이 무산 위기를 맞았다.
위장탈당ㆍ회기쪼개기 꼼수로 #민주당, 소수당 저항권 무력화 #합법이나 민주주의 이탈한 것
그 무렵 필자가 출입하던 자민련 기자실에선 “차라리 민주당이 의원 3명을 자민련에 꿔주는 게 간단하겠다”는 얘기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현실적인 해법이라기보단 기자들끼리 100%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아무리 한국 정치가 엉망이라지만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용돈처럼 꿔준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런데 황당하게도 농담은 현실이 됐다. 그해 연말 배기선·송석찬·송영진 의원이 전격적으로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건너온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의원 꿔주기’ 파동이다. 당시 자민련 강창희 의원은 의원 꿔주기에 대해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이라며 국회 교섭단체 등록 서명을 거부했다. 열 받은 JP는 강 의원을 당에서 제명한 뒤 민주당에서 장재식 의원을 추가로 꿔 와 기어코 교섭단체 등록을 마쳤다.
20여 년 전의 기억은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강행 처리 과정에서 일으킨 민형배 의원 ‘위장탈당’ 사태와 오버랩된다. 국회법 57조2는 다수당이 법안 처리를 밀어붙일 경우 소수당의 요청으로 안건조정위를 구성해 최장 90일간 운영하도록 했다. 6명으로 구성되는 안건조정위에서 다수당의 몫은 3명으로 제한되는데, 소수당이라도 90일은 법안 처리를 막을 수 있도록 저항권을 보장한 것이다. 이게 바로 2012년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의 정신이다. 그런데 민 의원은 위장탈당을 통해 무소속이 되면서 소수당 몫의 안건조정위원으로 끼어들었다. 여야 3:3이 실질적으로 4:2로 바뀌면서 민주당은 순식간에 안건조정위를 무력화시켰다. 창의성에선 의원 꿔주기를 능가하는 기발한 꼼수다. 이뿐 아니라 이번에 민주당이 야당 필리버스터를 막기 위해 구사한 ‘회기 쪼개기’도 위장탈당과 맞먹는 교묘한 수법이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이런 신종 기법이 전부 합법적이어서 문제가 없다고 강변한다. 합법은 맞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형식적 법체계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관용·평등·상호견제·합리주의 등의 정신은 법조문만으로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국회선진화법이 소수당의 저항권을 세밀히 규정했어도, 민주당이 법조문의 틈새를 파고들어 저항권을 무력화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어떤 행동이 올바른지에 대한 보편적 규범이 필요하다. 의원 꿔주기나 위장탈당이 법적으론 가능해도 국회 운영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규범적 인식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나마 20여 년 전 새천년민주당은 의원 꿔주기에 대해 다소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보였다. 민주주의 규범에 어긋난다는 양심의 소리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더불어민주당은 위장탈당, 회기 쪼개기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 같다.
정략적 성격이 강했던 2001년 DJP 재공조는 결국 얼마 못 가 파국을 맞았고, 지금 의원 꿔주기는 의회민주주의에 상처를 입힌 정치공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대선 패배 뒤 민주당이 느닷없이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외치며 들고 나온 위장탈당, 회기 쪼개기는 20년쯤 뒤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