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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생산기술 뛰어난 한국, 미국과 전략 기술 공동 개발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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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기정학(技政學) 시대의 한·미 기술·산업동맹 전략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비극적인 전쟁을 통해 하이브리드 전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목격하고 있다. 국가 안보, 공급망, 국방 전략, 경제산업, 금융시스템, 과학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직결되어 있다. 그동안 냉전 시대의 평화를 유지해주는 장치로 인식되었던 핵무기도 어쩌면 사용될 수도 있는 무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직접 참여를 못 하고 간접 지원에 그치고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 국민의 용감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야욕이 서서히 실현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앞으로 어느 나라가 침략을 당해도 미국이 나서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우방이라 생각하고 있던 많은 나라는 이번 전쟁에서 미국이 보인 행동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실이 유엔 안보리의 러시아 규탄 결의안 투표 결과다. 중국의 기권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인도의 기권이 관심을 끈다. 인도는 미국·호주·일본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4개국 안보 협의체(쿼드)의 일원이다. 또 친서방 국가로 알려진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도 기권했다.

한국 산업은 미국 산업과 직접 경쟁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 구조 가져
미국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배터리·제철·조선·정보통신산업에 강점
한·미의 반도체·배터리 동맹을 전략 기술 전반으로 확대 발전시키려면
바이든 대통령 방한 때 미국의 세계 경영에 한국의 협력방안 제시해야

연합체제로 세계 경영해야 하는 미국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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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이제 혼자서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일본·인도·호주와 함께 쿼드를 통하여 반중국 연합을 시작했다. 영국·호주와 함께 안보동맹 오커스(AUKUS)를 조직하여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미국은 핵 추진 잠수함(SSN) 기술까지 호주에 제공하며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고, 최근에는 일본에 오커스 참여를 요청했다고 한다. 또 미국 의회가 한국과 일본을 미국·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의 정보 공유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포함하는 논의를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이 반도체 생산국인 한국·일본·대만과 함께 칩4(Chip-4) 동맹을 제안했다는 소식도 있다. 현대 산업의 쌀인 반도체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을 위한 전략인데,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것이다. 공급망이란 생산에 필요한 말단 부품에서부터 원료·장비·완제품의 이동 경로를 말한다.

지난해 5월에 한국과 미국은 정상회담에서 반도체·배터리 협력을 강조하여 기술동맹이라 불릴 정도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미·중 패권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은 핵심적인 동맹국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21세기의 힘의 원천은 국제 정치와 군사 외교에 그치지 않고 기술과 산업 경제 분야에까지 확대되며, 미국 독자적으로 모든 부담을 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 정치는 그동안 지리적인 위치가 중요한 지정학(地政學) 시대에서 이제 기술도 중요해지는 기정학(技政學)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의 가장 좋은 파트너 한국

그동안 한국은 항상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이 미국에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느낌이다. 미국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와 배터리를 생산 공급하고 있으며,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미국 산업에 타격이 가는 상황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맹국들과 기술 협력을 강화하여 세계 경영을 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어느 나라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후보가 쿼드와 오커스 회원국들이다. 영국·호주·인도·일본이다.

영국은 미국의 오랜 우방이면서 충분한 과학기술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동안 제조업을 소홀히 해온 영국의 생산 기술력은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을 맞추기 어려워 보인다. 그다음의 일본 역시 오랜 우방이다. 일본의 탁월한 소재·부품 생산력은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일본의 산업구조가 미국 산업과 경쟁하는 것들이 많다는 점이 걸린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 등은 미국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고, 정작 미국에 필요한 반도체·배터리·정보통신 기술은 그다지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다. 호주는 미국이 핵 추진 잠수함 기술까지 제공할 정도로 믿음직한 우방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학 기술력이 미국과 시너지를 낼 정도인지 미지수이다. 인도는 이번에 유엔에서 보인 행태로 보아 미국에 충실한 우방인지 불확실하다.

한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안정적이고 실력 있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은 혈맹이면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든든한 우방 역할을 해왔다. 또 한국 산업은 미국 산업과 직접 경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미국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배터리·제철·조선·정보통신 산업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상호 보완적인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함께 기술 개발과 생산시설을 운영할 능력을 갖춘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생각한다.

미국에 필요한 한국의 생산 기술력

한국과 미국은 현재 반도체와 배터리 동맹을 전략 기술 전반으로 확대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미국이 전반적인 첨단 기술에서 가장 앞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들을 실용화하여 전략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은 파트너가 필요하다. 한국 생산 기술력의 우수성은 이미 증명되었다. 미국이 세계 경영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 기술을 한국과 공동 개발하고 공동 생산하면 매우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자유 민주 진영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서 한국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은 5G 통신을 세계 최초로 실현할 정도로 정보통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국방산업에 기초가 될 철강·조선 등 제조업이 발달했다. 미국과 함께 전략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공유하며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미래 기술 중에서 특히 양자 컴퓨팅, 우주항공, 원자력, 지능형 반도체 기술 등은 한·미 협력으로 시너지가 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동안 주로 도움만 받던 한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경영에 협력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동시에 다음 달 한국을 방문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숙고해볼 만한 대목이다.

AI·로봇·우주 등 자주국방-수출 일거양득 기술 개발해야

정부는 지난해 말 ‘10대 국가 필수전략기술’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을 선언하였다. 2030년까지 최고 기술국 대비 90% 이상의 기술 수준 달성을 목표로 ▶반도체·디스플레이 ▶2차전지 ▶사이버보안 ▶첨단바이오 ▶첨단로봇·제조 ▶5G·6G ▶우주·항공 ▶양자 ▶인공지능(AI) ▶수소 등이 선정됐다. 산업경제는 물론 국가 안보에까지 기술이 직결된 기정학(技政學)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전략이다.

필자는 이들 10대 기술 중에서도 산업경제는 물론 국방력 증진에 직결된 기술을 우선하여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기술로 경제력과 국방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들은 자주국방과 수출의 일거양득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시장을 보면 군수 산업도 일반 산업 못지않게 규모가 크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방산 수출 실적은 70억 달러(약 8조3500억원)로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다. 스톡홀름 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에 따르면 한국은 2016~2020년 방산 수출 세계 9위를 달성하였다.

우리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는 경제안보의 핵심이자 인공지능(AI), 5G·6G와 더불어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이다. 이런 첨단기술은 국방력과 직결된 기술이다. 특히 AI는 다양한 산업 응용이 가능하고 첨단로봇·제조 분야 등과 함께 국방 분야에도 폭넓은 활용성을 가진다. 또 우주항공 기술은 말할 필요 없는 민군 겸용 기술이다.

양자 컴퓨팅 기술 역시 국가 안보 관점에서 매우 큰 전략적 가치를 지닌 일거양득 기술이다. 또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전환 가속화에 따라 사이버보안 역시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야다. 양자 기술은 사이버보안 강화를 통한 정보 주권 확보에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이처럼 융합을 통한 국방과학기술의 경쟁력 강화는 단순히 무기나 장비를 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방력 강화와 수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일거양득 기술의 집중 개발을 통해 자주국방은 물론 국가의 신성장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