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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우크라 전쟁, 원인은 미국이다" 석학의 파격주장, 美 발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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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이 두 달을 넘겨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전쟁이 일어난 근본 원인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미국 학계와 정계 일각에선 전쟁 원인을 기존 통념과 다른 시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일고 있다.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의 대가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가 대표 주자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동맹 규합에 전념할 때 전쟁이 발발한 근본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상황 악화를 막고 전쟁의 끝도 가늠할 수 있다면서다.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교수 [중앙 포토]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교수 [중앙 포토]

미어샤이머 교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그것과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구분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은 미국이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와 여야 정치권, 주류 학계·언론이 볼 땐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자신도 "일반 통념에 반대되고, 주류 사회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수설"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주류 언론이 미어샤이머 교수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그의 이론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지난 3월 뉴요커는 ‘존 미어샤이머가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해 미국을 비난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왜 서구는 우크라이나 위기에 주로 책임이 있는가’를 제목으로 한 그의 기고를 실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기고에서 "푸틴이 전쟁을 시작했고 전쟁 전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는 다른 문제"라고 밝혔다. 이어 "서구의 주류 견해는 (푸틴이) 구소련의 형태를 띠는, 보다 위대한 러시아를 만드는 데 전념하는 비이성적이고, 이해하지 못할 침략자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푸틴이 홀로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데, 이 같은 주류의 시각은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서구, 특히 미국이 우크라이나 위기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씨앗은 2008년 4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뿌려졌다고 봤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행정부는 이 회의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나토 회원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푸틴과 러시아는 즉각 반발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러시아에 대한 "실존적 위협(existential threat)"으로 여기며 이를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천명했다. 러시아가 레드라인을 그었는데도 미국은 경고를 무시했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대한 "서구의 방어벽(bulwark)"으로 삼으려 했다는 게 미어샤이머의 시각이다.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러시아를 자극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미어샤이머는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는 나토, 경제적으로는 유럽연합(EU)에 편입하고, 이념적으로는 친미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전략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국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2014년 2월 '메이단 혁명'으로 친러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하자 이에 반발한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 돈바스 지역 내전을 부추겼다고 봤다.

그가 보는 전쟁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지난해 11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디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이 체결한 '미국-우크라이나 전략적 파트너십 헌장'이다. 이 헌장은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를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재천명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끓는 점에 도달했다"고 경고했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를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응하지 않자 푸틴이 "나토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침공했다는 게 미어샤이머 교수의 시각이다.

주류의 시각에서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나토 가입을 원하고, 모든 나라는 스스로 외교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또 모든 나라가 국경을 접하는 이웃 국가의 성향을 선택할 수 없는데, 러시아는 접경하는 우크라이나가 서구화되는 것을 무력으로 막겠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반박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1962년 소련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로 미·소가 대립한 군사 위기를 거론하며 당시 미국이 지금의 러시아가 느끼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중국이 만약 미국의 이웃인 멕시코나 캐나다와 손잡고 중국군을 주둔시키려 하면 미국은 가만히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미어샤이머는 지금 미국에 가장 큰 적은 러시아가 아닌 중국이며, 러시아를 대적하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것은 미국 국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고 격려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갈 게 아니라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중국과 전략적 경쟁에 전념할 것을 주문했다. 빠른 종전을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중립 선언이 해법이라고 제안한다.

미어샤이머의 전쟁 원인론을 놓고 “푸틴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는가”라는 비판이 잇따른다. 단 미국의 진짜 경쟁자는 러시아가 아닌 중국이라는 지적엔 동조하는 여론도 꽤 있다.

한편 랜드 폴 상원의원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미어샤이머 교수 의견을 언급하며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폴 의원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면서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되면 나토와 러시아 간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이 참전해야 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대해 블링컨 장관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몰도바 등 러시아가 공격한 나라들은 나토 회원국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나토 회원국이 되면 러시아가 침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대 주장을 폈다. 또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 권리라고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