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새 정부 과기혁신정책, 임무지향형으로 재편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윤곽 안보이는 새 정부 과학기술혁신 과제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다음 주 화요일이면 새 정부가 출범한다. 지난 두 달은 새 정부의 방향과 국정과제를 설정하는 중차대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뇌리에 남은 것은 청와대 이전과 ‘검수완박’ 뿐이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대통령 당선인이 과학기술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가 있다. 정보통신기술계에서는 ‘정보통신 홀대론’이 나왔다. 교육계에서는 ‘교육 뒷전론’이 나돈다. 새 정부가 지향하는 양대축에 ‘공정과 상식’과 함께 ‘과학기술 중심’이 있다고 기대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벌써 어두워졌다. 지금은 긴 팬데믹의 터널에서 벗어나 다시 도약해야 하는 시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중간 기술패권 경쟁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발발, 신냉전 시대의 도래가 현실화되고 있다. 에너지 자원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 위기에 탄소 배출량 감축이라는 고난도 미션이 겹쳐 온다. 잠재 성장률은 곤두박질치고 1인당 국민소득은 대만에 재추월당하기 직전이다. 모두 과학기술을 외면하고는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다.

개발도상 단계를 벗어난 이후의 역대 정부들은 과학기술혁신 분야의 중심 어젠다를 가졌었다.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과 ‘벤처 붐’을, 노무현 정부는 ‘혁신’, ‘과학기술중심사회’, ‘국가혁신시스템’을, 이명박 정부는 ‘지식경제’와 ‘녹색성장’을,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문재인 정부는 ‘4차산업혁명’, ‘혁신성장’, ‘디지털·그린 뉴딜’을 내세웠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당시의 글로벌 환경과 국가 발전 단계, 그리고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을 고려해 테마를 설정했고, 각기 나름대로 의미있는 기여가 있었다. 이를 수행할 정부 부처는 숨 가쁠 정도로 자주 바뀔 수밖에 없었다. 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처로부터 승격한 과학기술부, 부총리제 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를 거쳤다. 현 산업통상자원부도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를 흡수한 지식경제부를 거쳤고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조직개편 대상으로 오르내렸다. 윤석열 정부 과학기술혁신정책의 테마와 핵심 어젠다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직 그 어스름한 윤곽조차 보이지 않아, 몇 가지 고려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시대 본격화
반도체 등 기술주권 확보 전략 절실
전환적·포괄적 혁신정책 펼치려면
범부처 협의+시민 참여 작동해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9일 오전 대전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 반도체 연구 현장을 둘러보던 중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9일 오전 대전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 반도체 연구 현장을 둘러보던 중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첫째, 기술주권 확보 전략이 필요하다. 기술주권론은 자칫 국가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고, 모든 기술을 자체개발해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기술주권이란 한 국가가 사회적·경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기술을 스스로 개발하거나 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고 외부로부터 조달할 수 있는 독자적 권리를 의미한다. 주권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국가적 능력에 가까운 개념이다. 글로벌 기술패권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전략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전략기술이라 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기술들을 지칭했다. 그런데 안보의 개념이 확장되면서 전략기술의 범위도 넓어졌다. 신종 감염병에 의한 공중보건 위협, 사이버 공격에 의한 정보통신망 마비의 위협, 공급망 와해에 따른 산업생산 안정성에 대한 위협 등도 안보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식량 안보에는 쌀이, 에너지 안보에는 석유가 핵심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거의 모든 기술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핵심이다. 반도체가 쌀이고, 석유고, 전략무기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실리콘 웨이퍼를 손에 흔들며 미국내 반도체 생산을 역설하고,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찾는 이유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초격차’를 말했고,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후보 시절 반도체·배터리 등의 분야에서 초격차 전략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초격차는커녕 확실한 우위를 장담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기술 추격을 막겠다고 지키기와 굳히기에 힘쓰는 것은 큰 오판이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남보다 더 빨리 달리고 남들이 넘기 힘든 장벽 위에 먼저 오르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정책과 산업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전략기술을 식별 또는 선정하여 국내 기술수준을 체크해야 한다. 아울러 글로벌 공급망을 상시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품목도 국내 산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면밀히 따져야 한다. 무역상 기술장벽(TBT: technical barriers to trade)을 비롯해 전략기술에 대한 수출규제가 국내 기업에 미칠 파급효과를 예측해 대응해야 한다. 무역·통상을 담당할 조직에 산업기술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다.

둘째, 과학기술혁신정책을 임무지향형으로 재편해야 한다. 연구자가 자율적으로 제안하는 상향식 기초연구는 예외로 하고, 국책연구개발사업, 혁신도전 프로젝트, 산업기술 난제해결형 연구개발사업 등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정렬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임무지향형 연구·개발(R&D)의 사례는 우주발사체 개발이나 한국형 전투기 사업이다. 새로운 임무지향형 혁신정책에서 말하는 임무는 고령화·양극화·지역소멸과 같은 사회문제의 해결일 수도 있고, 인공지능이나 전기자동차와 같이 파급효과가 큰 기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며, 기후변화 대응과 같은 전 지구적 난제에 대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기술주권 확보와 기술격차 유지도 임무가 될 수 있다. 임무지향형 혁신정책에서는 임무 완수를 위해 다양한 접근과 정책수단을 동원하는데, 구체적인 수행방안은 연구자나 기업이 제안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민·관 파트너십이 필수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민관 과학기술위원회’는 임무지향 혁신정책을 위한 협력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정부가 주도하는 ‘답이 정해진’ 논의에 원로 과학자들을 들러리 세우는 식이어선 안된다.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의 역량은 정부를 넘어선다. 과학기술혁신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민관 위원회는 기업·대학·연구소의 전문가들이 주도하고 정부 부처들이 지원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셋째, 전환적이고 포괄적인 혁신정책을 펼쳐야 한다. 디지털 전환과 탈탄소 전환이라는 양대 전환이 진행 중이다. 이 전환들은 기술적이면서도 산업경제적·사회적 영향이 막대하다. 부담해야 하는 비용과 잠재적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전환을 도약의 기회로 삼는 전략이 필요하다. 전환의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 영역은 과학기술정책·산업정책·에너지정책·경제정책·사회정책을 망라한다. 특정한 부처가 담당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여러가지 정책이 함께 사용되며, 때로는 상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탈탄소 전환을 위해서는 화석연료 사용을 억제해야 하므로 가격을 높여야 하는데, 물가·서민생업, 그리고 산업경쟁력을 걱정해 유류세를 인하한다. 에너지 사용량을 줄여나가고 재생에너지 도입 비용을 충당하려면 전기요금을 현실화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환의 비용을 어떻게 분담하고 감내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숙의 민주주의(deliberate democracy)의 발전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유다. 대통령실의 수석비서관같은 단일 컨트롤타워보다는 범부처 협의체와 시민참여가 포함된 민관 파트너십이 원활히 작동해야 한다.

역대 정부의 과학기술 어젠다

역대 정부의 과학기술 어젠다

디지털 전환에 따른 산업구조 및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교육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 묵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에서 나아가 누구나 자기주도적으로 항상 학습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변화에 적응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재직자, 구조적 실업으로 일자리를 찾는 사람, 은퇴했지만 다시 일하기 원하는 장년층을 위해 소위 리스킬링(re-skilling)과 업스킬링(up-skilling) 평생학습 플랫폼이 필요하다. 학령인구 감소로 위기에 처한 대학이 평생학습 플랫폼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정책이 혁신정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야 하는 이유다. 다행히도 새 정부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교육이 먼저네, 과학기술이 먼저네 하는 식의 먹고 먹히는 다툼이 되면 안될 것이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 조직개편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 잘 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지만 새 정부의 비전이 조직과 부처명으로 천명되는 상징성도 크다. 거대 야당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서인지 정부조직 개편은 6월 지방선거 이후에나 고려한다고 한다. 지방선거 이후라고 상황이 나아질지는 모르겠다. 이례적으로 정부조직 개편 없이 출범하는 새 정부는, 어쩌면 부처를 어떻게 자르고 붙이는지보다 정책의 내용과 일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값진 깨달음을 줄지도 모른다. 새 정부의 과학기술에 대한 ‘적절한’ 무관심이 오히려 정치와 이념으로부터 과학기술을 자유롭게 해 연구자와 기업들이 신나게 혁신을 창출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