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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아들 장징궈 동거녀 임신하자 은밀히 멀리 보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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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6〉 

장징궈는 1주일에 하루는 민원을 청취했다. 공직자의 비행이 발견되면 직접 달려가 해결했다. 민원인 선정 책임자가 장야뤄였다. [사진 김명호]

장징궈는 1주일에 하루는 민원을 청취했다. 공직자의 비행이 발견되면 직접 달려가 해결했다. 민원인 선정 책임자가 장야뤄였다. [사진 김명호]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남다른 습관이 있었다. 매일 밤 일기를 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28세 때부터 시작해 57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당 고위층과 각료들에게도 일기 쓰기를 권했다. 새해가 임박하면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발행한 일기장을 선물했다.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징궈,  일기장선 친부 소문 부인

장제스의 손자들은 샤오(孝)자 항렬이었다. 장제스는 장야뤄의 소생인 쌍둥이 형제에게 샤오옌(孝嚴)과 샤오츠(孝慈)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사진 김명호]

장제스의 손자들은 샤오(孝)자 항렬이었다. 장제스는 장야뤄의 소생인 쌍둥이 형제에게 샤오옌(孝嚴)과 샤오츠(孝慈)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복잡한 사람이었다. 청년 시절 혁명가, 유학을 신봉하는 도학가(道學家), 상하이 조계(租界)의 플레이보이, 증권시장의 투기꾼, 사창가에서 밤을 지새우는 난봉꾼 등 신분이 다양했다. 청년 장제스는 자신이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알았다. 일기를 이용해 자신과 투쟁하며 병적일 정도로 무모하고 황당한 사생활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아들도 그러기를 바랐다. 가끔, 장징궈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곤 했다.

장징궈는 부친이 자신의 일기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50년대 말, ‘장징궈에게 사생아(私生兒)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런 일기를 남겼다. “간저우(竷州) 시절, 성실했던 친구 지춘(繼春·계춘)이 세상을 떠났다. 지춘과 가깝게 지내던 장(章)씨 성의 여인이 태기가 있다는 말에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구이린(桂林)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다. 아들 쌍둥이가 태어나자 입원 보증인이었던 내가 애 아버지라는 그릇된 소문이 나돌았다. 얼마 후 산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 애들은 십여 세가 되었다. 옛 친구와의 정 때문에 애들 생활 유지에 신경 쓴 적이 있다.” 일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장징궈와 3년간 동거 후 쌍둥이 아들 나은 지 6개월 만에 온갖 의문 남기고 인간 세상과 하직한 삼청단(삼민주의청년단) 간부훈련반 1기 출신 장야뤄(章亞若·장아약)였다.

삼청단은 정보원 양성이 목적이었다. 교육 한 후 전국에 산재시켰다. 장징궈는 간부 훈련에 역점을 뒀다. 1938년 말, 자신의 근거지 치주링(赤珠嶺)에 삼청단 간부훈련반을 별도로 만들었다. 장은 간부훈련반을 ‘삼청단 내의 삼청단’으로 만들고 싶었다. 1기 입학생 중 눈길을 끌던 왕셩(王昇·왕승)을 불렀다. “남녀 불문하고 10명을 추려서 10인단을 만들어라. 비밀리에 결의 형제를 맺어라. 장야뤄 빠뜨리지 마라.” 왕셩이 만든 10인단은 간부훈련반의 핵심이었다. 장야뤄 나이가 제일 많았다. 누님이 아닌 큰형님으로 자처했다.

삼청단 간부훈련원 시절 모친과 함께한 장야뤄(왼쪽). [사진 김명호]

삼청단 간부훈련원 시절 모친과 함께한 장야뤄(왼쪽). [사진 김명호]

장징궈는 장야뤄의 성격과 미모에 홀딱 빠졌다.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다. 도박장 덮칠 때도 같이 가고, 구보도 같이 하고, 산악 훈련도 같이 받았다. 장야뤄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모습이 처량해 보일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쟝야뤄는 젊고 예쁜 과부였다. 주변에 얼쩡대는 놈팡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장징궈는 과붓집 문전 조용할 날 없다는 모스크바 유학 동기의 농담 듣고 긴장했다. 급한 지시라도 있는 것처럼 장(章)의 집으로 갔다. 말로만 듣던 청년의 방문에 가족들은 놀라고 장(章)은 홍조를 감추지 못했다. 지방 순시 도중 용기를 냈다. 장(章)이 만든 개고기 장조림 먹으며 젊은 과부의 넋을 빼앗았다. “12년간 소련을 떠돌았다. 귀국한 지 2년이 지나도 나를 설레게 한 중국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함께 고향에 있는 모친을 만나러 가자. 모친은 중국 며느리 보는 것이 소원이다.” 장(章)은 노련했다. 한동안 젊은 상관을 빤히 쳐다봤다. 아랫입술 지그시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1939년 11월 2일, 일본 항공기의 공습으로 장징궈의 생모 마오푸메이(毛福梅·모복매)가 세상을 떠났다. 장은 소련인 부인과 어린 아들 데리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장야뤄는 실망했다. 명랑했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례를 마치고 온 장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각계 인사 초청한 좌담회 석상에서 기염을 토했다. “관할 지역의 모든 사람이 취업하고, 밥 굶지 않고, 헐벗지 않고, 집을 소유하고, 독서에 열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무시무시한 청년의 괴력에 익숙해진 참석자들은 요란한 박수로 화답했다.

쑹메이링은 간호사 파견해 돌봐줘

장징궈는 목표가 정해지면 달성해야 직성이 풀렸다. 성과가 눈에 보이자 장야뤄의 집으로 갔다. 모친의 유물이라며 원앙이불을 건넸다. 장(章)은 감격했다. 울고 웃기를 그칠 줄 몰랐다. 이날을 계기로 늦은 밤참과 이른 조찬 함께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1년 여름, 장(章)의 신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장징궈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단호했다. “네 처는 약점이 없는 현명한 여자다. 내조한다며 우리 망신시킨 적이 없다. 소련에서 너 하나 보고 중국까지 왔다. 이혼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 너는 다수를 위해 현지의 지주와 자본가, 공직자들에게 원한을 샀다. 사실이 알려지면 어디서 돌팔매가 날아올지 모른다. 장야뤄를 비밀리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켜 순산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장징궈는 장야뤄를 설득했다. “구이린에 있는 광시(廣西)성 성립(省立)의원 산부인과의 시설과 의술이 믿을 만하다. 천연동굴이 많다 보니 공습경보에 대처하기도 용이하다. 낯선 고장이라 아는 사람도 없다. 안전과 비밀 유지에 적합한 지역이다. 왕셩 외에 소수의 무장 경호원만 딸려 보내겠다.” 구이린에 도착한 장야뤄 일행은 깜짝 놀랐다. 묵고 있는 호텔에 순산을 기원한다는 화환과 선물이 넘쳐났다.

1942년 1월 15일 장야뤄가 사내 쌍둥이를 순산했다. 장징궈가 구이린에 달려오고,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도 간호사를 파견했다. 장야뤄는 희망에 들떴다. 6개월 후 엄청난 일이 닥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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