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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일자리 ‘빅 미스매치’]스탠포드대 컴퓨터공학과 604명 늘릴 때, 서울대 15명 증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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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호 10면

SPECIAL REPORT

약 3대 7. 고등학생들이 선택한 문과대 이과 비율이다. 2018년 고교 문·이과 통합 이후 정확한 수치는 나오지 않지만, 일선 교육 현장의 말을 종합하면 이쯤 된다. 2008년 IMF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문과대 이과 비율이 역전됐고, 지금은 취업에 유리한 이과를 선택하는 학생 수가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난해 4년제 일반 대학 기준 졸업생은 이공계가 37.7%, 인문계는 43.5%였다(예체능계 등 기타 18.8%). 박대권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는 “이공계 학과가 꾸준히 늘어나긴 했지만 산업 발전 속도 등 사회적 요구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며 “이공계를 더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첨단산업계의 인력난은 대학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수요(기업)와 공급(대학)의 미스매치로 기업이 찾는 인재는 없고, 대학을 졸업한 인재는 갈 곳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스탠포드대와 서울대의 컴퓨터공학과 정원만 봐도 무엇이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2008년도 141명이었던 스탠포드대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현재 745명으로 5배 증원됐다. 그러나 같은 기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55명에서 70명으로 15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그나마 15명 증원된 건 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인공지능(AI)국가전략’에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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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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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산업 발전 속도, 사회적 요구에 발맞추지 못하면서 기업·사회가 찾는 인재를 교육·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이라는 말이 등장한 게 3~4년 전인데, 여전히 대학은 인문계 인재 배출에 쏠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대졸자 전공과 직업 간 미스매치율은 50.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2개국 중 1위다. 한국경제연구원이 OECD 회원국 청년(25~34세) 고등교육 이수율·고용지표를 분석한 결과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서도 일자리와 전공의 불일치율은 52.3%로 취업자의 절반 이상은 전공과 무관한 일자리에 취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2021년 평가한 한국의 대학교육(시장 요구에 부응하는 정도) 순위는 64개국 중 47위에 그쳤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정부 규제 영향이 크다. 서울대 등 수도권 대학은 1982년 제정된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입학 정원 제한을 받고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40년 전에 만든 법으로, 수도권 대학은 정원을 늘리려면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학과 정원을 늘리거나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기 어렵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등 시대가 변했는데 대학은 기존 전공의 벽에 갇혀 있는 셈이다. 최두현 경북대 모바일공학과 학과장은 “과거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왔을 때 대학 사이에선 인문학과 공학이 결합한 통섭적 인재 양성이 화두였다”며 “그러나 정작 대학은 변화가 더딘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만 해도 업계가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 정원을 늘려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업은 그동안 필요 인력을 이른바 ‘계약학과’를 개설하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계약학과는 기업이 학생 채용을 조건으로 대학에 만드는 교육 과정으로, 대학은 입학 정원과 별개로 선발할 수 있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소 경제정책실장은 “대학 정원 규제를 일시적으로라도 완화해 산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의 적시 공급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정원을 늘리기 어려우면 대학이 자체적으로 학과 간 정원 조정을 하는 방법으로 첨단학과 정원을 늘리거나 개설할 수 있지만 정원 축소에 반발하는 교수들 저항에 부딪혀 옴짝달싹 못했다. 서울의 한 공과대 교수는 “인문계 학과의 경우 강의실과 교수만 확보하면 되지만, 공대는 실험·실습 장비 등 돈이 많이 든다”며 “대학 입장에서도 돈이 많이 드는 첨단산업 관련 학과보다는 인문·사회계열을 만들기 편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대학이 쉽게 만들 수 있는 학과만 늘렸고, 한 번 생긴 학과는 소속 교수 때문에 줄이기 힘든 구조가 된 것이다. 서동용 의원(더불어민주당)실이 ‘2012~2020년 4년제 대학의 학과별 입학 정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공학계열의 2020년 입학정원은 8만8648명으로 2012년 8만4638명보다 4010명으로 4.6%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 시기는 인터넷·이동통신 산업이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로, 대학이 기업이나 사회적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부분이다.

충분히 대응할 시간이 있었지만 교육당국은 이제야 첨단학과 정원 규제를 풀겠다고 나섰다. 2월 말 국무회의를 통과한 대학 정원 규제 완화안은 대학원 첨단학과 학생 증원 요건을 대폭 낮추는 게 골자다. 지금까지는 대학원 정원을 늘리려면 교사(건물)·교지(토지)·교원(교수)과 수익용 기본 재산에 대해 정해진 수준을 충족해야 했다. 하지만 반도체와 빅데이터·AI 등 21개 첨단 분야 관련 학과에 한해 교원 확보율 100%만 채우면 증원이 가능해진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최근 이 같은 교육부의 방안을 적극 수용키로 했다.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 “대학의 디지털 관련 학과 정원과 장학급 지급을 확대하겠다”며 ‘100만 디지털 인재 양성’을 공약한 바 있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첨단 테크기업이 진짜 필요한 인재는 석·박사급인데 이들의 수는 더 부족하다”며 “대학원 첨단학과 증원 방안에 인수위가 적극 동의해 정책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근본적으로 대학 정원 규제나 대학에 첨단학과 설립 장려 방안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이른바 ‘반도체특별법’(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에서도 수도권 대학 정원 확대 내용은 빠졌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과 함께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 대학의 한 인문대 교수는 “예컨대 인문대 일부 학과를 폐지하고 반도체학과를 만들더라도 이른바 문사철(문학·사학·철학)을 선행교육이나 필수교양으로 남겨두자”며 “이를 제도화한다면 대학 내에서 자유롭게 첨단학과 개설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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