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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때 라면·빵부터 잡았다"…식품업계 '물가단속' 새정부 눈치

중앙일보

입력

서울 한 대형마트의 라면 매대 모습. 연합뉴스

서울 한 대형마트의 라면 매대 모습. 연합뉴스

“어디 하나 졸라맬 부분이 없습니다.”
지난 28일 국내 한 식품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원가가 올라 비용끼리 ‘상쇄’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특히 새로운 정권 출범을 앞두고 한동안 ‘물가 단속’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식품업계는 대책을 고심하는 모양새다.

밀·팜유 40~50% 일제히 급등

각종 먹거리의 원재료가 되는 세계 곡물가격은 무섭게 오르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선물거래소(CBOT)에서 옥수수 가격은 연초대비 34.9%, 대두(콩)는 28.9%, 대두유는 51.9% 급등했다. 주로 빵을 만드는 데 쓰이는 단단한 경질밀은 42.7%, 쿠키나 케이크용 연질밀도 39.4% 올랐다. 팜유 역시 연초대비 40% 이상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최근 곡물·기름가격 상승의 직접적인 원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인도네시아의 팜유(가공유) 수출 금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합치면 세계 밀 생산의 3분의1이 넘는다. 세계 팜유 시장은 인도네시아가 56%, 말레이시아가 31%를 차지한다.

아직까지 국내 식품업계가 받은 타격은 미미하다. 대부분의 밀가루를 운송 거리가 가까운 미국과 호주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선 주로 유럽 국가들이 밀가루를 수입한다. 식용 팜유 역시 상대적으로 품질이 우수한 말레이시아산을 주로 수입한다. 다만 수급부족으로 세계 수요가 미국·호주·말레이시아 등으로 쏠리면 가격이 오르는 ‘풍선효과’가 나타나 한국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하반기 가격 또 올릴까     

곡물 가격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래 쭉 상승세였다. 공장·도시·항만 폐쇄, 격리·휴직 등에 따른 작업 인력부족 등으로 물류비와 인건비가 올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세계 석유와 천연가스 수급에 문제를 일으키며 에너지 가격까지 끌어올려 물류와 생산비가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국내 식품 대기업 관계자는 “(비용을)도려낼 데가 없으니 소비자 가격을 높이거나 기업이익이 줄어드는 걸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심은 지난 2월, 3년여 만에 인기 제품인 새우깡을 포함해 22개 스낵과자 제품을 평균 6% 인상했다. 연합뉴스

농심은 지난 2월, 3년여 만에 인기 제품인 새우깡을 포함해 22개 스낵과자 제품을 평균 6% 인상했다. 연합뉴스

식품업계 일각에서는 올해 하반기쯤엔 라면·과자·빵 등 가공식품 가격을 추가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내업체들은 선물거래를 통해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5~6개월치의 원재료 물량을 확보해 두고 있다. 라면업계의 경우 앞으로 최소 두 달치 재고는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원재료·물류·인건비가 이 추세로 계속 오를 경우 오는 9~10월께부터는 소비자 가격 인상 카드를 낼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한 제과업체 관계자는 “껌이나 초콜릿, 아이스크림 종류가 많은 업체는 밀가루나 팜유 등을 덜 쓰지만 기름값, 포장지값 등 안 오른 게 없어 문제”라며 “만약 설탕마저 뛴다면 정말 심각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준 키움증권 연구원은 “현재의 원재료 단가 상승 흐름이 안정화되지 않는다면 하반기에 가격을 인상해 수익성 방어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고 내다봤다.

“정권 초기, MB때처럼 갈 것”

하지만 당장 소비자 가격 인상은 어려워 보인다. 이미 라면·제과 업체들은 비용 상승을 이유로 지난해 여름 제품가격을 올렸다. 올해 설 연휴 직후엔 빵·떡볶이·햄버거·피자 등 외식업체들이 가격을 올렸다. 치킨도 지난달 교촌치킨과 bhc가 가격을 올린 데 이어 BBQ도 내달 2일부터 전 제품 가격을 2000원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업계 관계자의 말처럼 “실질적으론 부담이 가중되고 있지만, 현실적으론 가격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도네시아의 팜유 수출 금지 선언 등으로 국내 식품 물가 상승이 우려되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광장시장에서 상인들이 전을 부치고 있다. 지난달 수입 팜유 가격은 t당 1400달러 선을 처음으로 넘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2년 전보다 약 2배로 뛰었다. 연합뉴스

인도네시아의 팜유 수출 금지 선언 등으로 국내 식품 물가 상승이 우려되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광장시장에서 상인들이 전을 부치고 있다. 지난달 수입 팜유 가격은 t당 1400달러 선을 처음으로 넘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2년 전보다 약 2배로 뛰었다. 연합뉴스

또 다른 변수는 정치계 분위기다. 최근 식품업계에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시절 이야기가 자주 흘러나온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집중관리품목 52개’를 발표하고 물가 잡기에 나섰다. 여기엔 마늘·배추·무·달걀 등 농산물을 비롯해 밀가루·스낵과자·고추장·식용유·라면·설탕·빵·우유 등 가공식품이 다수 포함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경험상 역대 보수정권은 국민 지지를 얻기위해 반도체·자동차 같은 기간산업은 규제를 풀어주는 반면 식품·유통처럼 생활밀착형 산업엔 제재를 가하곤 했다”고 말했다. 실제 업계에선 “새 정부에서 가격을 올려 첫 번째로 찍힐 수는 없다” “이익이 줄고 주가가 떨어져도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식품·외식사업의 특성상 결국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의 피해가 클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중소 식품기업 관계자는 “구매조직이 큰 대기업은 재고가 넉넉해 오히려 지금같은 때는 추가 구매 없이 버틸 수 있고, 원가부담을 협력사에 넘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세완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 침체기엔 가격을 올리더라도 필수품이 아니거나 대체재가 있는 경우 오히려 소비자들이 등을 돌려 매출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쟁자들이 가격을 올리는 동안 원가부담을 버티며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등 전략적인 가격책정 정책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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