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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너무 많은 공관, 시민공간으로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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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함인선 전 한양대 교수·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

함인선 전 한양대 교수·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지방자지단체장들의 비효율적인 호화 관사 사용 행태를 비판하면서 불필요한 관사를 과감히 없애자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공관 대수술’ 기획 시리즈에 소개된 해외 사례와 국내 실태를 보면서 대한민국이 아직은 무늬만 국민국가이고 무늬만 지방자치 아닌지 묻게 된다.

관사가 굳이 필요한 직종이 있다면 주야 없이 제 위치에 대기해야 하는 군 지휘관일 것이다. 로마 시대 군 지휘관 텐트를 프라이토리움(Praetorium)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황제의 성 또는 막사를 가리켰으니 관사의 시작일 듯하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지자체장은 물론 판사·검사, 개발공사 사장, 국가정보원 지부장에게도 관사를 제공한다.

관사는 옛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
공원 등으로 바꿔 도시 되살려야

지방의 관사는 타지에 근무하게 된 공직자에게 주거 편의를 제공하던 관선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주민 아니면 단체장이 될 수 없는 시대다. 또 전국이 반나절 거리로 좁혀졌고, 비대면으로 모든 회의가 가능한 세상이다. 폴 라이언 전 미국 하원의장은 회기 중에 사무실 간이침대에서 지냈다. 산간오지가 아니라면 공짜 관사는 시대착오적인 특혜다. 모두 회수하는 것이 옳다.

공짜 관사를 이용한 ‘공관 재테크’의 원조는 김명수 대법원장이다. 아들 부부는 무상 거주와 공관 만찬으로 공분을 샀다. 그 대법원장 공관이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는 육군 참모총장 관사를 비롯해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한미연합사부사령관, 해병대사령관, 외교부 장관, 국회의장 등 모두 8개의 공관이 모여 있다.

왜 하필 한남동일까. 사대문 안과 가깝고 국유지도 많아서 그랬다지만 무엇보다 용산 미군기지와 국방부 때문이다. 군 관련 5개 공관은 그렇다 치자. 입법부와 사법부 수장의 공관은 안전성을 기대하며 터 잡았을 듯하다. 미군기지와 외교부 장관 공관 덕분에 한남동 일대는 54개국의 외국공관이 몰려있다. 더구나 주식자산 1조원 이상 부자 24명 중 14명이 이 동네에 산다. 알아주는 연예인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 장교 단지였던 유엔 빌리지에 모여 산다. 이곳은 단지 입구부터 초소가 있는데 어쩌면 한남동 자체가 ‘성안도시’(Gated community)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절 외국군 주둔지였던 용산이 시민 공간으로 돌아오고 대통령집무실도 이전할 예정이다. 이참에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인 각종 공관과 관저들도 ‘탈영토화’해야 한다. 이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간적 실천이기도 하다. 권력자들의 영지(Manor)가 시민의 공원으로 바뀐 서구 도시들의 경우는 뜻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하이드·리젠트·켄싱턴 파크를 비롯한 8개의 큰 공원은 모두 왕립이다. 과거 왕의 사냥과 연회에 쓰였던 장소다. 용산공원의 6배인 무려 600만평이나 되는 땅을 18세기 입헌제 이후 시민들에게 넘겼다. 독일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프랑스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도 왕족과 귀족들의 영지나 사저였다.

서구의 산업혁명이 계급혁명으로 치닫지 않게 한 일등 공신이 이들 도시공원이다. 반면 근대화 과정에서 이러한 획득 과정이 없었던 한국의 도시는 여전히 남루하고 살기 팍팍하다. 이제라도 공관과 관저를 공원과 문화공간으로 바꾸자. 청와대·경복궁·광화문광장을 합하면 71만㎡로 하이드파크의 절반이다. 하이드파크에 있는 미술관 서펜타인 갤러리는 세계 최고 건축가들이 매년 파빌리온을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와대 건물과 야외공간의 쓰임새로 더할 나위가 없다.

이제 공직자들은 특권적 공간을 떠나 시민들 속에서 일상의 공간을 찾으시라. “병사들은 (프라이토리움에서) 홀로 지내던 폼페이우스를 존경했다. 그러나 병사와 뒤섞여 자던 카이사르를 그들은 사랑했다.” 이 시대 지도층이 새겨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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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선 전 한양대 교수·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