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모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무속에 의지해 결정을 내린다는 소문을 종종 듣곤 합니다. 본인들은 ‘반대파의 음해’라고 반박하지만,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게 사실일 거라 믿는 모양입니다.
사실 무속과 주술이 아닌,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잡은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던 고대 시대에는 주요 군사·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전 반드시 점을 치게 했죠. 하지만 합리주의가 자리잡은 근·현대에도 점성술이 정치에 개입한 사례가 많습니다.
왜 현대의 정치인들이 점에 끌리는 걸까요. 19~20세기 정치와 무속과의 관계를 보여준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왜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소문이 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테죠. 무속과 주술은 특정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힘이 한결 커지는 경향이 보이니까요.
오컬트에 흠뻑 취했던 러시아
무속과 주술로 나라를 망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건 라스푸틴입니다. ‘광기의 수도사’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를 홀려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죠. 신의 목소리를 듣고 미래를 내다본다는 라스푸틴은 황제를 끼고 국정을 주물렀습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이 러시아 제국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지만, 라스푸틴의 농단 역시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라스푸틴에게 홀딱 속은 당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멍청이 취급을 받습니다. 지금 시각에선 잘 이해가 안되죠. 하지만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는 이른바 ‘오컬트’에 흠뻑 취해 있었습니다.
오컬트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상입니다. 이 세계에선 죽은 자의 혼령이 떠돌고(심령술), 별자리로 운명을 내다보며(점성술), 납으로 금을 만들 수 있습니다(연금술). 그러니 라스푸틴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할 수도 있었던 것이죠.
두 소녀의 장난에서 시작된 오컬트 광풍
19세기 초만 해도 오컬트가 대중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심령술이 나라를 한바탕 휩쓸더니 곧장 유럽으로 수출돼 5년도 안 되는 동안 전 대륙을 집어삼킵니다. 이 모든 사건은 두 소녀의 장난에서 시작됐죠.
1848년 미국 뉴욕주 외곽 마을에 살던 마거릿 폭스(당시 14세)와 케이트 폭스(당시 11세) 자매는 엄마에게 방에서 잘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유령이 쿵쿵대는 소리가 방에 울려 퍼진다는 거였죠. 이 소식은 신문에 실렸고 자매는 이내 전국적 유명인사가 돼버렸습니다. 전국을 돌며 유령과 소통한다는 교령회(交靈會)를 열었습니다.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죠.
두 자매가 인기를 끌자 유령과 소통한다는 사람들이 전국 여기저기서 등장했습니다. 유령이 탁자를 움직이는 시연도 도시마다 열렸죠. 선정성 경쟁을 하던 신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령술의 등장을 사실인 양 크게 보도했습니다.
자매의 유령 체험이 있은 지 5년도 안 돼 심령술은 유럽까지 휩씁니다. 영국과 프랑스엔 대륙적 명성을 얻은 심령술사도 등장했죠. 1850년대엔 러시아의 살롱마다 심령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고 하죠. 심령술은 미주와 유럽에 전염병처럼 퍼졌습니다.
심령술이 뭐기에 이렇게나 급속하게 번졌을까요. 당시 서구는 종교가 힘을 잃고, 과학적 발견이 폭발하던 시기였습니다. 전기를 쓸 수 있게 됐고, 사진이 발명됐으며, 거리엔 마차 대신 자동차가 나타났죠. SF 작가 아서 클라크가 말했듯,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당시 수준에선 심령술이 전기, 사진, 자동차처럼 놀라운 과학의 산물로 여겨졌던 거죠.
폭스 자매는 40년이 흐른 뒤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유령의 소리라는 건 자매가 관절을 꺾어서 내는 소리라는 걸 사람들 앞에서 시연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미 심령술은 거대한 산업이자 종교집단이 된 상태였습니다.
1880년에 이르면 심령술을 믿는 이가 미국과 유럽에만 800만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줄리아 만허즈 영국 옥스퍼드대 현대사학과 교수는 그의 책 『후기 러시아 제국의 현대적 오컬티즘』에서 “현대의 심령술은 정확히 미국의 10대 소녀 마거릿과 케이트 폭스로부터 시작됐다”며 “영국뿐 아니라 유럽, 러시아까지 순식간에 퍼졌는데, 심령술이 조작된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아무리 증명해도 대중들은 심령술을 진실이라 믿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역시 국교(國敎)인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같은 사상이 각축을 벌이던 정치적 혼란기였죠. 의지할 곳 없는 대중들은 불교와 요가 사상, 샤머니즘과 슬라브 민족의 토속신앙에 발을 담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오컬트와 심령술이 재빠르게 스며들었습니다. 이 음습한 환경에서 라스푸틴은 독버섯처럼 자랐던 거죠.
미국 정계의 점성술 스캔들
이 흐름은 세월을 넘어 최근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30여년 전 미국에서 정치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죠.
심령술과 함께 오컬트의 주요 분야로 자라난 게 점성술입니다. 점성술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잠잠하다 오컬트의 시대가 열리자 세상 밖으로 뛰어나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학회가 생겼고, 심령술 단체가 이들을 후원하기도 했죠
그러던 1899년 미국 뉴욕의 윈저호텔에 큰불이 났습니다. 당시 에반젤린 애덤스라는 점성술사가 이 화재를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죠. 당시 윈저호텔 대화재는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습니다.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사건입니다. 우리의 세월호 사건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애덤스는 이 사건을 예언했다고 알려지면서 스타덤에 오릅니다. 점성술 자체도 굉장히 유명해졌죠. 신문마다 ‘별자리 운세’를 싣기 시작했고, 태어난 별자리에 따라 운명을 점치는 것도 유행했습니다. 점성술은 우리의 점집이나 ‘오늘의 운세’ 같은 일종의 대중문화가 됐죠.
그러던 1988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말기 괴상한 폭로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수의 백악관 전직 인사들은 영부인 낸시 레이건이 점성술사의 말을 듣고 대통령의 국정에 개입했다고 밝혔죠. 대통령 일정을 조율하고, 심지어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에 대한 조언까지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일까요.
그 배경엔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됐을 즈음 떠돌던 괴소문이 있습니다.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죠.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었던 테쿰세는 백인에게 패퇴해 1813년 전사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저주를 하나 내렸는데, 20년 주기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이 임기 중에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는 겁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미심쩍기 짝이 없는 저주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왜냐면 실제로 1840년부터 20년 주기로 미국 대통령이 죽어 나갔거든요. 윌리엄 헨리 해리슨부터, 케네디까지 7명의 대통령이 임기 중에 암살 혹은 병으로 서거했습니다.
레이건 역시 1981년 총에 맞았지만 총알이 심장의 2㎝ 옆에 맞으면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낸시 레이건은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조앤 퀴글리라는 점성술사가 사건 당일이 레이건에게 위험한 날이라고 말했다고 전했죠. 낸시 레이건은 이때부터 불안감에 퀴글리의 조언을 듣기 시작했다고 하죠. 퀴글리는 회고록 『조앤은 뭐라 말하나(What does Joan say?)』에서 “로마 황제 시대 이후, 그리고 미국 대통령 역사에서, 한 명의 점성술사가 그렇게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오컬트가 유행하는 시대적 맥락
사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도 점성술사를 고용해 히틀러의 운명을 예견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처칠은 이 점성술사를 미국으로 보내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도록 대중을 설득하라는 임무를 맡기기도 했죠. 결국 오래 가지 않아 이 점성술사는 해고됐지만, 영국 첩보기관의 흑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점성술은 요즘 들어 서구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 절반 이상이 점성술이나 전생을 믿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죠. 영국에서도 별자리 운명에 대한 2020년 검색량이 5년 전보다 2배가 넘는다고 하네요. 영국 유명 출판사인 팬맥밀런은 특집 기사를 통해 “점성술이 1970년대 이후 다시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했죠.
옥스퍼드대 만허즈 교수는 “오컬트는 정치적 혼란기와 경제적 침체기에 급부상한다”고 했습니다. 삶의 경로를 예측하기 힘들 때, 다시 말해 ‘의외의 상황’이 내 운명을 좌지우지할 때, 점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걸 보면 만허즈 교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