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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능력만 보겠다? 그 능력은 누가 판단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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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새 정부 내각 인사 논란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시간을 14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의 첫 인사도 편향성 시비를 불렀다. 청와대 수석 인선이 영남 편중(10명 중 5명)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명박 당선인이 “내각 인선에는 국민통합적 요소를 고려하겠다”고 밝혔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남 출신 장관 내정자들이 5명인 데 비해 호남 출신은 두 명(최종 입각은 한 명)에 그쳐 ‘호남 홀대, 영남 우대’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성 내정자도 두 명에 불과했다(최종 입각은 한 명). 장관 내정자들의 평균 나이는 약 61세로,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기 내각보다 훨씬 고령이 됐다. 당시 총리 내정자(한승수)가 70대였던 점도 지금과 비슷하다.

국가는 이해관계 뒤섞인 복잡계
목표 뚜렷한 기업·검찰 등과 달라
갈등 조정 위해선 다양성이 필수
‘우리만의 세계’ 기댄 인사는 위험

MB 정부 닮은 윤석열 1기 내각

‘능력주의 인사’를 표방한 윤석열 정부의 첫 내각 구성이 다양성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윤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0일 내각 후보자 1차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능력주의 인사’를 표방한 윤석열 정부의 첫 내각 구성이 다양성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윤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0일 내각 후보자 1차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기업인 출신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내세운 인사의 기준은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윤석열 당선인도 “할당이나 안배를 하지 않고 오직 능력만 보겠다”고 밝혔다. 이명박·윤석열의 능력주의 인사는 기업 인사와 닮았다. 기업의 조직 목표는 명확하다. 이윤이다. 기업마다 내세우는 정체성과 사명 등이 있지만, 이윤 재창출 없이는 조직이 지속할 수 없다. 윤 당선인은 기업인 출신이 아니라 검찰, 그중에서도 특수부 검사 출신이다. 검찰의 목표는 범죄 처벌을 통한 사법 정의 실현이다. 기업과 검찰의 조직 목표는 다르지만, 효율과 성과를 우선한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다.

이명박 정부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땅 부자) 내각이라는 비아냥을 낳았다. 윤석열 정부도 ‘서육남’(서울대·60대·남자), ‘남영동’(남자·영남·서울대 동문) 등의 비판을 받고 있다. 국무총리 포함, 내각 후보자 19명 중 서울대 10명, 남성 16명, 60대 이상 13명, 영남 7명 등의 편중 인사를 빗댄 신조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 운영을 기업 경영의 연장선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는 못 했다. 지지율은 떨어졌고, 정권 기반마저 취약해졌다. 윤석열 정부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는 책에서 “기업 경영과 국가 경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한 바 있다. 크루그먼은 기업 경영 경험을 그대로 국가 경영에 대입할 수 있다는 CEO 출신 정치인들의 오만함을 비판하고 있다. 책의 초점은 거시 경제에 맞춰져 있지만, 국가 인사 철학에도 시사점을 준다.

국가와 기업의 근본적 차이는 규모와 복합성에서 나온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조직의 복잡성은 조직 크기에 ‘단순 비례’하지 않고 ‘제곱 비례’한다. 국내 최대 기업 삼성전자의 직원 수는 약 11만명, 국내 전체 취업자 수는 대략 2700만명 정도다. 규모 차이는 250배 정도지만, 고려해야 할 변수는 250의 제곱인 6만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기업의 영역은 관련 시장 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반면 국가는 훨씬 포괄적인 영역을 담당한다. 다양한 영역을 대표하는 인사를 뽑아 세부적·자율적 운영을 맡길 수밖에 없다.

목표가 뚜렷한 조직에서는 성과주의와 능력주의가 미덕이다. 그러나 국가의 목표는 명확하지 않다. 구성원들이 생각이 다 다르고, 합의하기도 쉽지 않다. 국가에는 ‘게젤샤프트’(이익사회)와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의 성격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국가 운영에서 내세우는 능력주의는 그 능력에 대한 판단을 누가 하느냐는 질문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정치는 갈등 관리 및 조정의 기술이다. 적절한 균형의 합의점에 도달하기 위한 끊임없는 설득과 소통이야말로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국가 지도자는 비전과 가치를 중시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 충돌을 조정하는 정치적 기술과 직관력이 필요하다.” 리더십 연구 권위자인 존 W. 가드너(전 스탠퍼드대 공공정책 교수)의 말이다.

‘가용성 편향’에 빠진 인사

가용성 편향은 개인적 경험 같은 친숙함을 토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심리를 말한다.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자인 에이머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아서 알아보려 하기보다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윤석열 정부의 능력주의 인사에는 이런 편향의 혐의가 묻어 있다. 너무 고민 없이 주변의 좁은 세계에서 사람을 구했다. 그 결과 부실 검증, 정실 인사, 내로남불 시비까지 불렀다.

새 내각의 면면은 참신성과는 거리가 있다. ‘능력이 입증된’ 사람을 쓰다 보니 이명박·박근혜 인사들이 대거 귀환했다. 대선 때 안철수 후보의 상임선대위원장을 지냈던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이들이 각성의 세례를 통과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측근 인사’ ‘지인 인사’라는 말도 나온다. 후보 19명 중 서울대 법대 출신이 5명이다. 문재인 정부 첫 내각에 서울대 법대 출신은 1명, 박근혜 정부에선 2명이었다. 윤 당선인이 말한 ‘인위적 안배 없는’ 인사가 특정 학맥 편중이라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윤 당선인과 한덕수 총리, 18명 장관 후보자의 평균 보유 재산은 43억원이다. 물론 재산이 많다고 해서 서민의 삶을 이해 못 한다는 비판은 단선적이다. 그러나 한국인 평균 가구 순자산의 10배가 넘는 재산 규모는 일반 국민에게는 아득한 거리감을 준다. 총리 후보자의 공직 퇴임 후 고액 보수, 장관 후보자들의 아빠 찬스 논란은 ‘그들만이 사는 세상’을 엿보게 한다.

위험한 권력의 근친 교배

권력의 근친 교배는 위험하다. 유럽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이 말해준다. 13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 왕실을 주름잡았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치 안정과 왕권 세습을 위해 근친결혼으로 얽혔다. 그 결과는 돌출된 턱과 치아 부정교합, 잦은 유아 사망, 심신 발육 부진 같은 후유증을 불렀다.

유전병은 대체로 열성 유전이다. 열성 유전자는 우성 유전자와 짝을 이룰 때는 형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근친 교배가 이어질 경우 열성 유전자끼리 짝을 이뤄 부정적 형질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 이질적 유전자를 받아들여 유전자 풀(pool)을 넓히는 것이 자연계 생명체들의 종(種) 보존 전략이다.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갔다. 촛불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우리 유전자는 다르다”며 다른 유전자가 섞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결과는 아는 대로다. ‘20년 집권’을 외쳤지만,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는 5년 집권 내내 편 가르기와 적폐 청산에 몰두하며 갈등을 정치의 동력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환멸의 결과가 윤석열 정부의 탄생이다. 그러나 새 정부의 첫 내각 인사는 통합 및 화합 기대감과는 거리가 멀다. 무감각하고 퇴행적이라는 싸늘한 시선마저 있다. 동종·근친 교배의 위험성을 외면하다 위기를 맞은 권력이 문재인 정부뿐이겠는가. 생존을 위협하는 충격이 없으면 각성하기 어려운 게 권력의 성격일까. 윤석열 정부의 첫걸음이 불안하다.

“다양성 확보한 기업이 실적도 더 좋다”

“대우그룹이 어려워진 데에는 지나친 엘리트주의도 작용했다고 본다.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동기생과 명문대 출신 CEO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그룹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옛 대우 계열사에 몸담았던 한 전문 경영인의 토로다. 그는 “지방대 출신을 중용하는 등 임원진의 구성을 고루 갖추었던 삼성그룹과 대비됐다”고 말했다. 두 그룹의 명암이 갈라진 원인(遠因)에는 대조적 인사 철학이 있었다는 아쉬움이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이윤이지만, 이를 위해서도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 최근 경영 트렌드다. 복잡한 외부 변수를 조직 내부로 포용·반영함으로써 장기 지속성과 발전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이다. P&G는 세계 각지 거점에 ‘다양성 관리자(Diversity Manager)’를 배치하는 등 다양성을 글로벌 경영전략의 일부로 활용한다. IBM, 필립스, 골드만삭스 등은 사내에 ‘다양성 위원회’를 만들어 인종·성·지역·문화적 문제로 발생하는 각종 이슈에 대응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재도약을 이끈 인도 출신인 사티아 나델라 CEO는 2014년 취임 때부터 다양성과 공감·포용성을 ‘기업의 영혼’으로 강조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사옥을 설계할 때 직원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위한 동선을 고려한 것도 다양성을 통해 창의력을 높이려는 노력이었다. 2020년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매켄지는 “이사회 내 다양성을 확보한 기업의 영업이익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21% 높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