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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이재명, 등판할 때 아니란 권고 숙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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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대선에서 패배한 지 석 달도 안된 후보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와 금배지를 달겠다고 한다면 납득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에선 그런 얘기가 리얼다큐로 통한다. 진원지는 6·1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는 송영길 전 당 대표의 의원직 사퇴다. 그가 지역구인 계양을을 내놓고 서울시장 선거 링에 오르면, 이재명 전 민주당 대선후보(현 상임고문)가 계양을에 출마한다는 소문이다. 계양은 2000년 16대 총선 이래 20년 넘게 민주당이 의석을 싹쓸이해온 지역이다.

송영길 전 대표부터 “이 고문이 지방선거 지원을 하든지 보궐선거에 나오든지 어떤 형태로든 등판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민주당의 친명(이재명)계 의원들도 “1600만 표를 얻은 정치인을 제도권 밖에 둬서 되겠나. 6·1 보궐선거에서 배지를 달고 원내에 들어와 당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

대선 패배 석달만에 계양 출마설
민주당 친명들도 ‘조기등판’ 연호
조기숙 “성찰부터” 일갈 경청하길

‘정치9단’이라는 DJ(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에서 진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갔다가 몇 년 뒤에야 여의도에 복귀했다. 그러나 시장과 도지사 경력이 전부인 ‘0선’ 정치인은 대선 패배 며칠 만에 메시지 정치를 재개하더니 석 달도 안돼 금배지를 달려 한다는 시나리오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어안이 벙벙하다.

‘이재명 조기 등판론’은 이 고문의 사법리스크와 맞물리면서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검경 수사를 막기 위해 민주당 텃밭 계양에서 손쉽게 금배지를 달아 방탄조끼를 두른 뒤 8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올라 이중 삼중 방탄막을 치겠다는 의도”란 의혹이다. 계양을 터줏대감인 송영길 전 대표조차 “이재명이 어디 출마할지는 가 봐야 안다”는 말만 할 뿐 명쾌하게 부인을 하지 않고 있으니, 계양 출마설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재명 조기등판을 연호하는 친명계 의원들의 논리는 이렇다. “3·9 대선 패배의 진짜 책임자는 문재인 정권과 친문세력이다. 그들이 부동산값 폭등을 비롯해 실정을 거듭한 탓에 이번 대선은 당초 10%P 차이로 대패할 뻔했는데 그나마 이재명 후보와 송영길 대표가 잘 싸워 0.7%P까지 차이를 줄일 수 있었다. 패배의 진짜 책임자인 친문들이 송영길 서울시장 출마와 이재명 보궐선거 출마를 반대하는 건 자신들의 잘못을 이재명과 송영길에게 전가하고,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을 계속 쥐고 가겠다는 욕심의 발로다.”

친문들에겐 궤변의 극치지만, 친명들에겐 진리다.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민주당엔 ‘분당(分黨)’ 괴담까지 돌고 있다. 친문들이 이 고문의 보궐선거 출마나 당권 도전을 막으면 친명계 의원들이 당을 깨고 나가 이 고문이 이끄는 ‘이재명당’을 만들 것이란 소문이다. 열흘 뒤면 야당 신세가 되는 민주당에 전국적 스타라곤 이 고문뿐이고, 그를 따르는 친명 의원들이 30~40명에 달한다니 분당설을 괴담이라 치부하기만도 어렵다. 그러나 상식을 가진 당원들에겐 이재명 조기등판설이나 분당설은 악몽일 뿐이다. 답답한 이들은 요즘 김경수 전 경남지사 사면에 목을 매고 있다. 문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 김 전 지사를 사면하면, 구심점을 상실한 친문들이 김 전 지사를 중심으로 결집해 친명계에 맞설 힘을 얻을 것이라 기대하는 거다. 100년 집권을 큰소리쳤던 민주당이 어쩌다 댓글 공작 유죄가 확정된 재소자에게 SOS를 치는 신세가 됐는지 딱하기 그지없다.

원조 친노 조기숙 교수는 그제 중앙일보 기고에서 “민주당의 생명은 민주주의에 있다. 한 개인의 정당이 되는 순간 빛이 바랜다”고 썼다. “유신·5공과 목숨 걸고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한 국민정당 민주당이 언제부터 한 개인(이재명)의 정당으로 전락했나”는 뜻일 것이다. 조 교수는 기고에서 “민주당의 대선 패배는 문재인 정부의 실정 때문이 아니라 이재명 후보의 도덕적 약점과 전략적 실책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문재인 리스크보다 문재인 프리미엄에 훨씬 큰 덕을 봤다. 문 대통령의 40%대 지지율을 고스란히 업고 갔다. 국회·사법부·선관위·언론 환경도 유리했다. 게다가 정부가 코로나를 명분으로 선거 직전 통 크게 쏜 재난지원금도 역대급 단비였다. 문 정권에 비판적인 조갑제 닷컴에도 ‘자영업자’란 이유만으로 300만원이 꽂혔다니,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부가 이렇게 법의 구애를 받지 않고 돈 봉투를 뿌려댈 수 있던 선거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재명 후보는 졌다. 조기숙 교수 말마따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보궐선거 출마가 아니다. 대선 패배의 진짜 이유가 뭔지 성찰하며 자숙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