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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기술패권 전쟁시대, 배는 산으로도 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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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윤석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윤석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격화되고 있는 미·중 기술 패권전쟁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회의에 얼마 전에 다녀왔다. 제시된 의견들은 새로울 게 없었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환경, 유니콘 기업을 육성할 혁신 생태계, 신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법과 제도의 문제점이 열거됐다. 간섭 배제와 자율성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가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그렇지만’이 발목을 잡았다. 자칫 배를 산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 “이제 과학기술 배는 산으로도 가야 합니다.”

2년여 만에 코로나19 거리두기가 폐지됐다.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 하는 불편은 있지만 코로나 시대가 이제 큰 전환점을 맞았다. 오랜만에 되찾은 여유를 역사물 드라마 ‘바이킹스’로 달랬다. 9세기 초·중반 덴마크와 스웨덴 일대를 다스렸다는 전설적인 바이킹 군주 라그나 로스브로크에 관한 이야기였다.

국내 첨단기술 선진국 60% 수준
‘무모해도 탁월한 도전’ 늘어나야

바다의 무법자 바이킹의 활약 중에서도 파리 공략을 다룬 육로수송(Portage) 편이 가장 인상 깊었다. 센 강의 협로에서 요새와 쇠사슬에 가로막혀 후퇴하던 중 라그나 로스브로크는 뜻밖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배를 세운다. 다른 약탈할 정착지를 찾아야 한다는 참모들에게 그는 말한다. “그곳은 파리가 아니다. 배를 절벽 위로 올려 산을 넘는다. 파리로 간다” 육로 공략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파리는 결국 포위되고 말았다.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입국의 기치 아래 KIST를 설립했다. 당시 세계 최빈국이던 우리나라의 그 선택은 국내외 경제학자들에게는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의 배고픔 해결 대신 미래를 선택한 지 반세기, 자원 부문에서 흙수저나 다름없던 악조건에도 우리는 이제 러시아·호주를 제치고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에 올라섰다. 그뿐만 아니라 21세기 문화강국 반열에 오르며 백범 김구 선생의 꿈마저 사실상 이뤄냈다. 영광스러운 오늘이다. 그럼 이제 충분한 걸까.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질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미래 세대에겐 우리의 오늘이 디스토피아(Dystopia)일 수 있다. 지난해 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우리나라를 다시 반등시킬 ‘10대 국가 필수 전략기술’을 선정했다. 그 기술들은 좀 더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나가지 않으면 기술패권 경쟁에서 도태되는 원천기술들이다.

문제는 2차전지를 제외하면 인공지능(AI), 양자, 우주·항공 등 대부분의 기술 수준이 최고 기술 보유국의 60% 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변하지 않으면 내려갈 일만 남았다.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다시 한번 우리 연구자들에게 지금의 무모하지만, 미래의 탁월한 도전을 허락하는 일이다. 새로운 지평을 열 길은 제한 없는 아이디어와 이에 대한 지원이다.

KIST는 지금 ‘98% 성공률’이 상징하는 위험회피형 연구개발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혁신을 추진 중이다. 대단히 도전적인 목표에 도전하는 ‘그랜드 챌린지’(Grand Challenge)가 대표적이다. 선정된 과제는 과정의 우수성을 평가받게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꼭 필요한 연구를 해내겠다는 소명에 찬 연구자를 응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단 1~2점에 등급이 바뀌는 줄세우기식 평가는 과감히 폐지했다. 연구자가 대형 연구 주제에 도전하기 위해 개인평가의 유예를 신청할 수도 있게 했다. 게임 체인저 기술을 목표로 하는 연구자들에게 경쟁자는 옆 실험실의 동료가 아니라 오랜 시간 관련 연구에 평생을 바쳐 온 세계의 석학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혁신보다 편하고 익숙한 길을 권하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답하려 한다. “우리의 목표는 선진국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과학기술이란 배는 산으로도 가서 선도 국가로 가야 합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석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