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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석민이 고발한다

억울한 청주 여중생의 죽음, 검수완박 세상에선 절반 묻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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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민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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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청주 여중생 사건' 피해자 가족 측은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그래픽=전유진 기자

지난해 9월 '청주 여중생 사건' 피해자 가족 측은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그래픽=전유진 기자

단짝 친구인 여중생 미소와 아름(둘 다 가명)이가 지난해 5월 12일 충북 청주시의 고층 아파트 화단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투신으로 결론냈다. 어린 학생의 죽음이라고 하면 흔히 학교폭력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들의 비극엔 전혀 다른 얘기가 등장한다. 의붓아버지의 성범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름이의 새아버지 원○○은 지난해 12월 1심 재판에서 아름이에 대한 성폭행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유사 성행위·강제추행·아동학대는 인정), 아름이 친구 미소에 대한 성폭행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는데 재판부는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리고 내가 법무사로 피해자 가족을 도와 사건을 챙기고 있는 ‘청주(오창) 여중생 사건’의 개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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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이 진행 중인 이 사건을 소환한 건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정권을 내주기 직전 기를 쓰고 강행하려는 작금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란 때문이다. 대체 여중생의 죽음과 검수완박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잠시 다시 재판을 보자. 원○○은 지난해 12월 1심에서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으며 이렇게 주장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마지막 변론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 명의 범인 중 아홉 명을 놓쳐도 단 한 명의 억울함이 없는 피고인에게 자유를 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억울함이 없는 공정한 재판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유와 증거를 법정에서 최선을 다해 보여주고 판사님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증거를 제시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과 기자 모두 법정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이뤄진 원○○의 최후변론은 30분 넘게 이어졌다. 차분하게 정의와 공정을 이야기하고, 형사 재판의 중요 원칙까지 다 말했다. 한마디로 모든 혐의(중학생에게 술을 마시도록 한 아동학대 제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부실 재판으로 이어지는 검수완박

원○○의 최후변론 가운데 ‘이유와 증거를 법정에서 보여주고 판사를 설득할 논리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증거재판주의와 공판중심주의를 뜻한다. 법관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내용으로 판단하라는 요구다. 올해부터 공판 제도가 바뀌어 경찰과 검찰이 작성한 조서를 피고인의 동의 없이는 법원이 직접 증거로 쓸 수 없다. 피고인이 재판정에서 부인하면 그만이다. 검수완박은 여기에다 피고인에 유리한 정보 비대칭까지 만든다.

청주 여중생 사건 같은 중요 사건은 검사가 경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아 기소에 이르기까지 직접 주요 관계자를 불러 조사해왔다. 경찰이 건넨 서류만으로는 사건 전모를 알기 어려운 데다 경찰 수사가 미진한 부분을 다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검수완박은 이를 무력화한다.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이 한다'는 검수완박 원칙은 다시 말하면 검사는 경찰의 사건 기록에만 의지하라는 말이다. 피고인을 방어하는 변호사는 사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검사에게는 문서를 통한 간접 정보가 전부다. 공판중심주의를 채택한 법원은 과거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데 검사는 경찰이 넘겨준 기록만 보고 법정에 서야 한다. 죄를 짓고도 법망을 빠져나가는 범죄자가 늘어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법조계와 언론이 이런 문제(검찰 수사 금지로 인한 부실 기소와 부실 재판)를 지적하니 박병석 국회의장(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2일 검수완박 법안 중재안에 ‘송치 사건에 대하여는 범죄의 단일성과 동일성을 벗어나는 수사는 금지한다’는 단서를 달면서 검찰의 보완수사 권한을 일부 남겼다. 민주당은 실제 법안에는 ‘동일한 범죄사실의 범위 내에서는 (보완수사를) 할 수 있다’고 고쳐 넣었다. 일반인 눈엔 암호문 같은 이 문장을 청주 여중생 사건에 대입해 설명하면 이렇다.

시간을 돌려 다시 지난해 4월 29일. 미소는 ‘아름이는 아동학대, 나는 강간이래, 1년이면 나온대’라는 문자메시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경찰이 아름이의 피해를 아동학대로만 보고 있기에 의붓아버지 원○○이 설령 처벌을 받는다 해도 감옥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미소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 없다는 미소 부모의 주장이 맞는다면 미소는 아마 아름이를 통해 이런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지난해 8월 청주(오창) 여중생 사망 100일 추모제에 등장한 그림과 글귀.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청주(오창) 여중생 사망 100일 추모제에 등장한 그림과 글귀. [연합뉴스]

실제로 경찰이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로 수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소 부모가 원○○을 고소한 후 두 소녀가 숨질 때까지 3개월여 동안 경찰이 아름이에 대한 성범죄 존재 여부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았다고 의심할만한 정황은 있다. 두 여중생이 투신한 후에야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검찰 주도로.

만약 두 여중생의 극단적 선택이 없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피해자 미소의 불길한 예상대로 경찰이 아동학대 혐의만 적용해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면, 그리고 검수완박 법이 이미 지난해 봄에 시행이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검찰은 의붓아버지의 아름이에 대한 성범죄를 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일한 범죄사실(아동학대)의 범위’를 넘는 성범죄에 대한 보완수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검수완박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중요한 경계가 바로 여기다. 지금까지는 설령 경찰이 실수로 아동학대 결론을 낸 뒤 검찰로 송치해도 검사가 기소에 필요한 수사 과정에서 성폭행 관련 단서를 발견하면 추가 수사를 해 친족 강간으로 기소했지만, 앞으로는 불가능하다. 위법한 기소라서다. 법원은 피고인의 친족 강간 혐의에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만약 경찰이 실수 또는 잘못을 한다면 검사는 그대로 승계해야 하고 법원도 그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한다. 부실한 수사를 바로잡을 길이 사라진다.

수사권 조정도 비극에 일조

사건 기록을 보면 아름이에 대한 범행도구 중 하나인 밧줄이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피해자 미소 가족을 돕기 시작할 때부터 가졌던 의문이다. 1심 선고가 끝난 지난해 말 피해자 가족에게 원○○ 직장에 직접 가 보자고 했다. 그곳에 처음부터 아름이의 진술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형태의 밧줄이 있었다. 이 밧줄은 항소심에선 증거로 채택됐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간단하다. 경찰은 원○○ 직장을 압수수색을 하지 않았다.

'청주 여중생 사건' 가해자를 엄벌해 달라는 국민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캡처]

'청주 여중생 사건' 가해자를 엄벌해 달라는 국민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캡처]

요즘 경찰은 사건에 떠밀려 산다. 준비 없는 수사권 조정으로 폭증한 업무는 수사 지연으로 이어진다. 미소 가족은 지난해 2월 경찰에 고소를 했는데 그로부터 101일 뒤 두 여중생이 비극을 맞은 후에야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한 정치인은 수사권 조정의 폐해는 처리 기간이 오랜 걸린다는 것 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무책임한 말에 치가 떨린다. 두 아이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것이다.

가해자에게만 좋은 세상

형사 재판은 피고인(변호인 포함)과 검사의 대결이다. 수사는 기소를 전제로 하기에 수사와 기소는 원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유능한 형사 변호인들은 수사 초기부터 관여한다. 원○○도 수사가 시작 되자마자  ‘형사 전문 변호사’ ‘성폭력 변호사’를 검색했고, 수사 초기부터 변호인을 선임하여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경찰관과 검사가 힘을 합해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 어렵다. 그런데 검사의 손을 묶어 가해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 피해는 과연 누구에게 가겠는가. 당연히 힘없는 서민이다.

1심 재판부는 아름이에 대한 성폭행(친족 강간) 부분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형사재판에서 증명책임은 검사에게 있고, 유죄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하는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그 증거가 없다면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법원이 증명책임은 경찰이 아닌 검사에게 있다고 하는데,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은 이를 나눠 증명은 경찰이, 책임은 검사더러 지라고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판사(김혜수 분)는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판사(김혜수 분)는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넷플릭스]

부실 수사, 부실 재판에 따른 피해는 경찰도, 검찰도, 이 법안을 통과시킨 정치인도 지지 않는다. 오롯이 피해자와 가족이 안게 된다. 드라마 ‘소년심판’ 속 주인공 여판사(김혜수 분)는 말한다.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이 글을 읽은 모든 독자가 어느 날 검수완박 때문에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