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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울린 검수완박 "성범죄 빼더니 보완수사 막아"

중앙일보

입력

#사례 1
미성년자를 협박해 현금을 뺏고 불법 촬영한 혐의를 받는 한 남성. 경찰은 휴대전화에서 촬영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해당 사건을 검찰로 송치하지 않았다. 검찰 단계에 와서야 구체적인 피해자 진술이 확보됐고, 보완 수사 끝에 해당 혐의가 추가로 송치됐다.

#사례 2
술에 취한 부하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한 남성 공무원. 경찰 조사 당시 피해 여직원의 정신적 상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찰로 송치된 후 보완 수사가 이어진 끝에, 강제추행 혐의는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변경됐다.

#사례 3
가출 청소년들을 성추행하고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를 받는 한 남성. 검찰 단계에 와서야 디지털 포렌식 등이 이뤄져 성매매 알선 혐의가 드러났다.

지난 18일 인천지검이 공개한 성폭력 사건 기소 사례다. 당시 인천지검 관계자는 "정확한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채 사건이 처리될 경우 상당수 사건을 기소하지 못하거나 성범죄자들을 가볍게 처벌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성진 대검찰청 차장 검사가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관련 검찰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성진 대검찰청 차장 검사가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관련 검찰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이미 피해 큰데…수사 미비 우려"

지난해 1월부터 성범죄 피해자들은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토로해왔다. 2020년 형사소송법이 개정하며 검찰이 경찰 수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없애고,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범죄도 6대 범죄(부패, 경제, 공직자, 선거, 방위사업, 대형참사)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성범죄는 경찰만 수사를 개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은
① 경찰이 불송치 결정서도 전달하지 않거나 제대로 쓰지 않아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기가 힘들었던 사례
② 경찰관이 신뢰관계인 동석을 허락하지 않거나 가해자 쪽에 피해자 정보를 넘긴 사례
③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합의를 강요한 사례
④ 검찰 송치 이후에야 혐의가 입증되거나 추가 혐의가 드러난 사례
⑤ 관할서가 수차례 바뀌고 수사가 지나치게 지연되는 사례
등을 지적해 왔다.

결국 피해 신고와 고소를 어렵게 결심한 피해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며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이 통과되면 피해자들의 고통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우려다. 경찰에 일이 더 몰려 수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지연되고, 보완 수사 범위도 ‘동일한 범죄사실’로 지나치게 한정돼 숨겨진 혐의를 충분히 수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숨은 피해자·숨은 혐의 있어도 못 찾아"  

2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따르면, 검사는 경찰이 송치한 사건의 범죄사실과 동일한 범위 내에서 보완 수사를 해야 한다.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없어지긴 했어도, 검찰이 직접 보완 수사에 나서는 범위에는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개정안에 '동일성' 요건이 생기면서, 검찰 단계에서 추가 피해자가 발견되거나 공범이 발견되더라도 검찰이 직접 보강 수사에 나서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특히 숨은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큰 친족 성폭력 사건, 추가 혐의를 꼼꼼하게 수사해야 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우려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장기간에 걸쳐 피해가 발생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일 역시 어려워진다.

핵심은 피해자들이 경찰의 일차적인 판단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는 "성폭력 사건은 판단자의 시각 훈련도가 매우 중요해 사건이 경찰과 검찰을 지나며 결론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면서 "특히 진술의 신빙성이 예민하게 다뤄지는 사건들은 판단을 여러 차례 거치는 것이 피해자든 가해자든 유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예원 장애인인권법센터 변호사도 "검찰만이 모든 혐의를 잡아내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검찰의 보완수사를 제도적으로 막아두는 것은 피해자들의 인생이 달라지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사실상 검찰의 보완 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며 우려를 표했다.

"수사 지연 우려도 여전"

수사가 지금보다 더 지연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오 변호사는 "피해자나 가해자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채워질 수 있는 간단한 사실관계, 상해진단서 같은 간단한 증거만 추가되면 해결될 문제라도, 보완 수사 '동일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검경을 수차례 오가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검찰이 추가 혐의를 포착해 경찰에 보완 수사를 요구할 수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 역시 여전하다. 부족한 인력에 지나치게 많은 사건을 호소하는 경찰이 보완 수사를 제때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한데도, 검찰에 수사지휘권이 없으니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오 변호사는 "사건을 처리했던 경찰관에게 다시 보완 수사 요구가 내려가다 보니, 해당 경찰관이 사건에 이미 편견이 있다면 제대로 된 보완 수사를 기대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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