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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위협 北, 핵전쟁 운운 러…핵에 포위된 '비핵국가'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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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한쪽에선 자의적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핵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다른 한쪽에선 공공연히 핵전쟁을 운운한다. 핵에 둘러싸인 ‘비핵국가 한국’이 처한 현실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5일 조선인민혁명군(항일유격대)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에서 “우리의 핵이 전쟁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돼 있을 수는 없다.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둘째가는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핵 사용의 문턱을 대폭 낮춘 것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5일(현지시간) “현재 핵전쟁 위험은 실재하며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공공연히 핵 사용 가능성을 언급해 왔다. 최근에는 핵탄두를 탑재해 세계 어디든 타격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도 했다.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노동신문. 뉴스1.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노동신문. 뉴스1.

핵 선제 사용 조건 모호화

모두 한국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북핵 위협 축소에 급급했던 문재인 정부 5년간의 공백과 여전히 국내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후진적 정치 행태 등은 한국이 이런 위협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우려를 키운다.

전문가들은 특히 김정은이 핵 선제 사용의 조건으로 든 ‘근본 이익 침탈’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데 주목했다. 한‧미의 어떤 행동도 꼬투리 잡을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근본 이익 침탈은 얼마든지 확장 가능한 모호한 개념”이라며 “북한은 사실상 자신들의 자의적 판단으로 군사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핵을 선제 사용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는 핵 공격을 받을 경우 자위적 수단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 전통적인 입장을 벗어나는 것이며,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미국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 러시아가 이미 좋지 않은 선례를 만든 점을 북한이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핵화 의지 실상 드러나

문재인 정부가 대북 정책의 근거로 삼아온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도 사실상 실체가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2018년 3월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특사단장으로 방북해 김정은을 만난 뒤 돌아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남‧북‧미 간 연쇄 정상회담을 견인해냈다. 대화 뒷받침을 위해 연합훈련을 축소 및 유예하는 등 스스로 ‘가드’도 내렸다.

하지만 결국 김정은은 이런 문재인 정부의 신뢰를 핵 사용 태세의 공세적 전환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데 이용한 셈이다.

김정은 집권 초기 북한은 “적대세력이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2016년 1월 4차 핵실험 성명)이라고 밝혔다. 지난 2020년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전쟁 억제력이 결코 남용되거나 절대로 선제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고 직접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1월 8차 노동당 대회에서는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우리를 겨냥하여 핵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핵무기 불남용’ 원칙만 언급하고,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은 뺐다. “핵 무력의 둘째가는 사명”을 거론한 김정은의 이번 연설은 핵 선제 사용과 관련한 태세 전환이 끝났다는 마침표를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2018년 3월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난 대북 특사단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윤건영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현 외교부 장관), 김 위원장, 서훈 당시 국정원장(현 국가안보실장), 천해성 당시 통일부 차관, 김상균 당시 국정원 2차장. 중앙DB.

지난 2018년 3월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난 대북 특사단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윤건영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현 외교부 장관), 김 위원장, 서훈 당시 국정원장(현 국가안보실장), 천해성 당시 통일부 차관, 김상균 당시 국정원 2차장. 중앙DB.

NSC 건너뛴 靑

하지만 청와대는 안전보장회의(NSC)조차 소집하지 않았다. 외교부가 “정부는 북한이 한반도 및 지역 정세에 긴장을 초래하는 행동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지만(26일 최영삼 대변인), 유감이나 우려 표명조차 없이 “외교적 해결의 길로 조속히 나오라”고 했을 뿐이다.

2020년 10월 열병식 뒤 곧바로 “군사력을 선제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입장에 주목한다”고 했던 국방부는 이로부터 하루 더 지난 27일에야 “우리 군은 독자적인 가용능력과 한미 동맹의 확장억제 실행력을 지속 강화해 왔다”는 입장을 냈을 뿐이다. 그마저도 공식 발표나 기자단 전체에 배포한 게 아니라 문의하는 언론사에만 입장을 알려주는 식의 조용한 대응이었다.

한국의 정부 교체기를 틈타 북한의 핵 도발 우려가 더 커지고 있지만, 국회 차원의 대응도 전무하다. 열병식 이후에도 국회 국방위원회나 외교통일위원회를 소집할 기미조차 없다.

‘검수완박’과 인사청문회 등 국내정치적 이슈와 관련한 정쟁에만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핵 위협 앞에서도 분열하는 한국 정치의 후진적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 노동신문. 뉴스1.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 노동신문. 뉴스1.

확장억제 업그레이드 절실

‘윤석열호’는 이처럼 출범부터 다층적 핵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북한과 러시아가 대놓고 눈앞에서 핵을 흔들어대지만, 현실적으로 자체 핵무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미국의 핵우산을 두껍게 하는 방안을 우선 강구해야 한다.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부터 한‧미 확장억제 실행력 강화를 추진해왔는데, 기존 체제의 복원 정도가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과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한‧미‧일의 전직 고위 외교안보 관료들은 지난해 2월 보고서를 내고 ‘아시아 핵기획그룹’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 일본, 호주를 미국의 핵 기획 과정에 포함하고, 함께 미국 핵전력에 관한 구체적 정책들을 논의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북한에 대해 ‘전술핵을 실제 사용할 경우 미국의 핵 보복을 피할 수 없다. 정권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다’는 강력하고 단호한 억제 메시지를 내는 게 필요하다”며 “단순한 의지 표명을 넘어 확장억제를 실제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등에 대해 한‧미 정부가 구체적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동의 핵 위협에 처한 유일한 비핵 국가인 일본과의 안보 공조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윤 정부가 출범 직후 한‧미 동맹 강화만큼이나 한‧일 관계 개선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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