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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배출한 파평 윤씨 문화유산 보러왔다”…관광지로 떠오르는 명재고택[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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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 윤씨 문중 문화유산에 몰리는 관람객 

지난 26일 오전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明齋故宅). 수도권 등 전국에서 찾아온 관람객 30여 명이 중요민속문화재 190호인 고택 곳곳을 둘러봤다. 명재고택에 사는 윤완식씨는 관람객들에게 고택 시설과 역사적 배경 등을 설명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 김방현 기자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 김방현 기자

명재고택은 조선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4)의 제자들과 아들·손자 등이 지었다. 윤완식씨는 윤증의 13대 장손이다. 1만2000㎡부지에 안채·사랑채·행랑 등 5개 동(棟)이 있다. 윤완식씨는 "일제 강점기만 해도 건축물이 13개 동에 달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노성면은 윤석열 당선인 부친 고향 

논산시 노성면에는 윤증의 후손인 파평 윤씨 집성촌이 있다. 노성면은 파평 윤씨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의 고향이다. 관람객 정모(서울시)씨는 “대통령을 배출한 문중의 문화유산을 보고 싶어 찾았는데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려 힐링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명재고택을 찾은 국민의힘 국민공감미래정책단(단장 윤진식 전 산자부 장관) 금융위원회 회원. 왼쪽부터 금기조(전 우리은행 부행장) 공동위원장, 신동규(전 은행연합회장) 위원장, 윤완식 파평 윤씨 장손, 노태식 부위원장(전 금감원 부위원장), 윤석구(전 우리종금 전무)부위원장 겸 간사. 김방현 기자

지난 22일 명재고택을 찾은 국민의힘 국민공감미래정책단(단장 윤진식 전 산자부 장관) 금융위원회 회원. 왼쪽부터 금기조(전 우리은행 부행장) 공동위원장, 신동규(전 은행연합회장) 위원장, 윤완식 파평 윤씨 장손, 노태식 부위원장(전 금감원 부위원장), 윤석구(전 우리종금 전무)부위원장 겸 간사. 김방현 기자

3·9대선 후 파평 윤씨 문중 문화유산인 명재고택 등이 관광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명재고택을 비롯해 종학당·윤황고택·노성향교·유봉영당 등 문중 관련 옛 건축물이 상당수 있는 데다 주변 경관도 빼어난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여행사도 관광상품 준비" 

이날 명재고택에는 수도권에 있는 여행사 직원 10여 명도 찾았다. 윤 당선인 배출을 계기로 파평 윤씨 문중 문화유산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명재고택 측은 “대통령 선거 후 관람객이 차츰 늘어 요즘 하루 100여명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여행사 관계자들이 명재고택을 둘러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26일 여행사 관계자들이 명재고택을 둘러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22일에는 국민의힘 국민공감미래정책단(단장 윤진식 전 산자부 장관) 금융위원회 회원들도 찾았다. 신동규(전 은행연합회장) 위원장, 금기조(전 우리은행 부행장) 공동위원장, 노태식 부위원장(전 금감원 부위원장), 윤석구(전 우리종금 전무) 부위원장 등이다. 국민공감미래정책단은 윤 당선인에게 정책 자문을 해왔다. 신동규 위원장은 “대통령 당선인 문중의 뿌리와 역사가 궁금해서 찾았는데 조선시대 명문가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파평 윤씨 문중이 경기 파주에서 논산으로 이주한 것은 1538년이다. 파평 윤씨 시조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의 19대 손인 윤돈이 21세 때 부인의 고향에 정착하면서다. 당시 정착한 지역이 논산시 광석면 득윤리(得尹里)다. ‘윤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파평 윤씨, 1636년부터 논산에 정착

노성의 파평 윤씨는 논산 정착 후 100여년 만에 연산의 광산 김씨, 회덕의 은진 송씨와 더불어 호서삼대족(湖西三大族)으로 자리 잡았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윤여갑 국학 자료조사위원은 “논산에 처음 정착한 윤돈의 아들 윤창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과 싸웠고, 그의 3남 윤전은 병자호란 와중에 순국했다”며 “요즘으로 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셈”이라고 했다.

윤석열 조상, 벼슬길 나서지 않아 

명재고택 인근 종학당 정수루에서 바라본 풍경. 앞에 병사저수지 등 경관이 제법 수려하다. 김방현 기자

명재고택 인근 종학당 정수루에서 바라본 풍경. 앞에 병사저수지 등 경관이 제법 수려하다. 김방현 기자

파평 윤씨가 조선 성리학의 명문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윤증의 조부인 윤황(1571~1639)때부터다. 이조참의, 사간원 대사간(오늘날 감사원장)을 지낸 윤황은 병자호란·정묘호란때 강한 항전 의지를 보이며 척화를 주장했다.

윤황의 여덟 아들 중에서 넷째 문거(文擧)의 직계 후손이 윤석열이다. 윤문거는 효종·현종 양대에 걸쳐 임금이 현재의 검찰총장 격인 사헌부 대사헌 벼슬을 열 번이나 내렸지만 고사했다. 윤황의 다섯째 아들 선거(宣擧)의 장남인 윤증도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지만 소론(少論)의 영수(領袖)가 됐다.

명재 윤증의 조부인 윤황고택. 김방현 기자

명재 윤증의 조부인 윤황고택. 김방현 기자

하지만 윤증은  조선 왕조 개국공신이던 훈구파에 밀려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사림파는 선조 때 동인(이황·조식 등)과 서인(이이·성혼 등)으로 나뉜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한다. 서인은 숙종 때 송시열의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의 소론(少論)으로 갈려 대립했다.

종학당 등 볼만한 문화유산 많아 

명재고택 인근에는 종학당(宗學堂)이 있다. 종학당은 윤황의 아들인 윤순거·윤선거 등을 중심으로 문중 회원이 돈을 모아 만들었다. 종학당내 정수루 앞에는 병사저수지 등과 어우러진 풍광이 펼쳐진다. 정수루는 ‘맑은 물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의미다.

유봉영당에 있는 윤증 영정. 유봉영당은 윤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김방현 기자

유봉영당에 있는 윤증 영정. 유봉영당은 윤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김방현 기자

또 명재고택 옆에는 궐리사(闕里祠)와 노성향교, 윤황 고택, 유봉 영당(윤증 사당) 등이 있다. 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권리’라는 명칭은 공자가 자란 마을 권리촌에서 유래한다.

명재고택에서는 염색 등 각종 체험 프로그램도 운용하고, 고택스테이도 한다. 간장·고추장과 간장게장·떡전골 등 음식이 전해온다. 윤완식씨는 “관람객을 위해 체험프로그램도 늘리고 주변도 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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