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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1000대 기업 대표이사 변동 현황 대공개

중앙일보

입력

‘중대재해처벌법’ 의식했나…대표이사 자리 내려놓는 오너 경영자들 _최은석

지난해 하반기 이후 대표이사 물러난 오너 경영자 11명… 법 시행 하루 전 사임하기도
오너 경영자 단독 대표이사 339곳 불과… 사고 나면 전문경영인이 책임질 가능성 높아

지난 1월 11일 광주 화정아이파크 건설 현장에서 외벽이 붕괴돼 노동자 6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 사진:장정필 중앙일보 객원기자

지난 1월 11일 광주 화정아이파크 건설 현장에서 외벽이 붕괴돼 노동자 6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 사진:장정필 중앙일보 객원기자

중대재해처벌법이 1월 27일부터 시행되면서 재계 최고경영자(CEO)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오너 경영자들도 초긴장 상태다. 중대재해가 발생해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법인을 법규 의무 준수 대상자로 정하고 사업주에 대해서는 안전 보건 규정을 위반한 경우에 한해 처벌한다. 반면 중대재해처벌법은 법인과 별도로 사업주에게도 법적 책임을 묻는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사업주 또는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법인에는 5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노동자가 다치거나 질병에 걸릴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다만 5인 미만 사업장 등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1000대 기업 중 법 비켜간 오너 경영자 절반 넘어

중대재해가 발생해 처벌을 받게 될 경우 1순위 대상자는 현재로서는 해당 기업의 대표이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한국 재계에 중대재해법 처벌 1순위로 거론되는 대표이사 직함을 가진 오너 경영자는 실제 얼마나 될까. 조사한 결과 1000대 기업 중 오너 경영자가 단독으로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비율은 약 30%에 그쳤다. 특히 80곳은 오너가 미등기 임원 직위를 통해 경영에 관여하고 높은 보수를 받지만 법적 책임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월간중앙이 기업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CXO연구소(소장 오일선)와 공동으로 ‘2022년 1000대 기업 오너 경영자 대표이사 현황’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조사 대상 업종은 중대재해가 비교적 다수 발생하는 건설과 석유화학 업종을 비롯해 기계, 운송물류, 철강, 전자, 자동차, 고무 및 플라스틱, 조선중공업, 전기장비, 비금속 광물, 제지, 전기가스 업종 등 주요 13개 산업 분야다.

조사 기업은 이들 업종에서 사업보고서(상장 및 비상장)를 제출하는 기업 중 매출액 상위 1000대 기업(2020년 별도 재무제표 기준)이다. 각 기업의 대표이사 현황은 최근 공시된 2021년 사업보고서를 기초로 했고 올해 정기 주주총회 변동 사항까지 반영했다. 금융 및 지주회사, 유통, 정보기술(IT), 제약, 식품 등 중대재해 발생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업종군은 이번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권택환 신대양제지 대표, 법 시행 전날 사임해 눈총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1000대 기업 중 오너 경영자가 단독으로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곳은 339곳으로 집계됐다. 1000대 기업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등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려운 오너 경영자가 10명 중 3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오너보다는 전문경영인이 책임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조사 결과 1000대 기업 중 전문경영인과 오너 경영자가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곳은 132곳으로 파악됐다. 이들 기업까지 합치더라도 1000곳 중 오너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곳은 471곳으로, 전체의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1000대 기업 오너 중 반 이상이 중대재해 발생 시 우선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셈이다.

특히 지난해 6월 말부터 올해 3월 말 사이 대표이사직을 내던진 오너 경영자만 해도 11명이나 돼 눈길을 끈다. 이들 중에는 임기가 만료돼 자연스럽게 물러난 경우도 있었지만 임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중도 사임한 경우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오너 경영자는 신대양제지와 대영포장 대표이사를 맡아왔던 권택환 전 대표다. 권 전 대표이사는 신대양제지에서는 지난 3월 28일, 같은 그룹 계열사인 대영포장에서는 3월 30일까지가 공식 임기 만료 시점이다.

그러나 그는 두 회사에서 임기 만료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지난 1월 26일 갑작스럽게 대표이사직을 사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중대재해처벌법이 본격 시행되기 하루 전날 급하게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월간중앙 취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30일 신대양제지의 손자회사인 대양판지 장성공장에서 30대 노동자가 인쇄기 로봇 리프트에 끼여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1월 1일에는 신대양제지의 자회사인 광신판지 안산공장에서 일하던 40대 노동자가 비슷한 사고로 사망했다. 권 전 대표이사가 중대재해처벌법 1호 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대표직을 다급하게 내려놓은 것일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신대양제지 관계자는 “책임 경영 강화를 위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려는 목적의 사임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현중 정기선, 법 시행 이후 HD현대 대표 맡아 눈길

(왼쪽부터)정의선 현대차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허창수 GS건설 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왼쪽부터)정의선 현대차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허창수 GS건설 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김영준 성신양회 전 회장도 임기를 채우지 않고 사퇴했다. 그의 등기임원 임기 만료 시점은 오는 2024년 3월 26일이다. 김 전 회장은 임기가 2년 이상 남은 지난해 7월 대표이사직은 물론 미등기임원에서도 아예 물러났다. 후임 회장 자리는 김 전 회장의 아들 김태현 회장이 이어받았다. 1970년대생인 김 회장은 그러나 공식 대표이사가 아닌 미등기임원 회장 직위만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회피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번 자료를 분석한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김 회장이 부친에 이어 바로 대표이사를 맡게 돼 사고가 발생할 경우 중대재해법 처벌 대상 1순위자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우선 소나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김 전 회장은 지난해 퇴직 소득까지 포함해 60억원이 넘는 급여를 받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정몽원 만도 회장, 이봉관 유성티엔에스 회장, 김준년 동일제강 대표이사도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중도에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오너군에 포함됐다. 정몽원 회장은 내년 3월이 임기 만료 시점이었지만 1년 정도 앞서 최근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이봉관 회장도 지난 3월 29일 임기가 종료되지만 지난해 10월 갑작스럽게 대표이사에서 사임했다. 김준년 대표이사 역시 최근 사내이사직만 유지한 채 대표이사직을 벗어던졌다.

임기 만료로 자연스럽게 대표이사를 그만둔 오너 경영자도 다수 있었다. 김상태 피에이치에이(구 평화정공) 회장, 심충식 선광 부회장,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 임충헌 한국화장품제조 회장, 임화섭 가온미디어 사장 등이 여기에 속했다.

오너 경영자가 중도 사임이나 임기 만료 등으로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도 다소 모호하다. 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처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후로 오너 경영자들이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대표이사 자리에 새로 오른 오너 경영자도 있었다.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사장이 주인공이다. 정 사장은 최근 HD현대(구 현대중공업지주)와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오너 경영자가 신규로 대표이사를 맡은 사례가 드물어 눈길을 끈다.

[박스기사] 대표이사 자리 지킨 오너 경영자들… 책임경영 의지 부각 - 매출 1조원 이상 대기업 대표이사 19명이 오너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대표이사를 그대로 유지한 오너 경영자들이 부각되고 있다. 그만큼 중대재해에 대해 책임을 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 대상 1000개 기업 중 매출 1조원이 넘는 대기업에서 오너 경영자가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사례는 19명으로 집계됐다.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정의선 회장이 대표적이다. 정 회장은 특히 현대자동차 등기임원 만료 기간이 지난 3월 말이었지만 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상관없이 최근 정기 주주총회에서 재선임되며 대표이사직을 계속 유지하게 됐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관련해 대표이사 회장으로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중대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건설 업종에서는 허창수 GS건설 회장을 비롯해 정몽열 KCC건설 회장, 이복영 SGC이테크건설 회장, 이승찬 계룡건설산업 사장 등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오너 경영자들 역시 일부 중견 건설사 오너들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려는 흐름과는 대조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는 분위기다.

석유 및 화학 업종에서는 신동빈 롯데케미칼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정몽진 KCC 회장, 이우현 OCI 부회장,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등이 대표이사로 활약 중이다. 이 중 정몽진 KCC 회장과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은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등기임원에 재선임됐다. 철강 업종에서는 류진 풍산 회장, 장세욱 동국제강 부회장이 대표이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너 경영자 그룹에 속했다.

이 밖에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 김홍국 팬오션 회장,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 윤성희 덕양산업 대표이사, 김종구 파트론 회장도 대표이사직을 보유한 오너 경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부자(父子) 모두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곳도 있었다. 강병중 회장과 강호찬 부회장은 넥센타이어 대표이사로서 경영 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choi.eu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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