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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과거가 파괴한 러시아의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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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파괴한 것은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다. 그는 러시아의 미래도 파괴했다. 소련 해체 전인 1990년 러시아의 경제규모는 미국의 10% 정도였다. 지속적인 경제 침체와 루블화 약세로 1990년대 말에는 미국의 2∼3%로 하락했지만 2000년대 들어 회복하면서 2013년에는 14%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장기 경제성장의 핵심 요인인 인재가 떠나고 외국 자본이 이탈함으로써 러시아의 미래는 망가졌다. 푸틴이 계속 집권하는 한 인재와 자본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조가 있었다. 2011년 필자는 모스크바의 한 대학 총장을 만났다. 그는 당시 총리였던 전(前) 대통령 푸틴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뒤를 이어 다시 대통령이 될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러시아가 권위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없다. 푸틴이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나라를 떠날 것이다.” 실제 푸틴이 재집권한 1년 후에 그는 러시아를 완전히 떠났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 따르면 2014∼19년 동안 5만 명에 달하는 과학자가 연구와 일을 위해 외국으로 향했다. 푸틴이 일으킨 전쟁은 이들이 러시아로 돌아올 가능성을 현저히 줄였다. 그뿐 아니다. 미국 시카고대의 러시아 출신 경제학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열흘 만에 20만 명의 러시아인이 외국으로 떠났다고 추산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전쟁이
러시아의 미래를 파괴하고 있어
제재로 전쟁 중단시키기 어려워
이런 슬픈 전쟁, 이번으로 끝날까

맥도널드도 러시아를 버렸다. 1990년 1월 모스크바 중심가에 처음 매장을 연 후 맥도널드는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빅맥을 맛보고 자유와 풍요의 분위기를 느끼려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가 수백 미터 줄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 그런 맥도널드가 러시아 내 매장을 폐쇄했다. 현재까지 670여 개에 달하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거나 영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응해 러시아는 비우호적 국가의 기업이 철수할 경우 기업 자산을 러시아 소유로 이전한다는 내용의 법안 제정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런 법을 만들고 집행한다면 러시아의 미래는 더욱 파괴된다. 자산을 빼앗긴 외국 기업이 다시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싶을까.

문제는 당장 전쟁을 중단시킬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대(對)러시아 제재도 그만큼 강력하진 못하다. 러시아 일부 은행을 스위프트(swift) 결제망에서 퇴출했지만 다른 러시아 은행이나 중국 등을 이용한 결제는 가능하다. 서방에 예치된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접근을 차단했으나 러시아는 금과 위안화 표시 외화로 당분간 버틸 수 있다. 더욱이 러시아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인 석유와 가스로 계속 외화를 벌 수 있다. 석유와 가스 수출은 전체 수출의 절반을 차지하며 그로 인한 재정 수입은 정부예산 수입의 40%에 달한다. 그런데 미·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서방 국가는 자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과 인도 등이 수입을 오히려 증가시킬 수도 있다.

석유 수출의 중요성은 1990년대 말 러시아의 금융위기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1998년 러시아는 외채상환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으나 이듬해 경제는 크게 반등했다. 금융위기가 루블화 가치를 떨어뜨린 데다 세계 유가가 상승해 석유 수출액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막대한 비축유 방출은 유가 상승을 억제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출 뿐 아니라 러시아의 외화 수입이 증가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러시아 석유와 가스 수입을 전면 금지할 수 없는 구조에서 제재가 당장 경제를 무너뜨릴 만큼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 북한의 주력 수출품인 광물을 모든 유엔 회원국이 수입하지 못하게 금한 대북(對北) 제재보다 대러시아 경제제재의 효과는 작을 수밖에 없다.

전쟁을 근본적으로 막는 힘은 시민의식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독립적인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 센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에 대한 지지도는 오히려 크게 올랐다. 올해 초의 70%에서 지난 3월에는 83%로 상승했다.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응답도 69%로서 1990년대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로 높다. 이처럼 현재 러시아를 과거 소련과 혼동하는 인식 불일치가 미래를 망치고 있다. 1992년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시작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많은 러시아인은 초강대국 소련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푸틴은 대국민 담화에서 슬라브족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과거를 소환했다. 그는 자신이 ‘영광의 시대’를 재현할 수 있을 것처럼 호도하며 이를 비판하는 언론을 탄압한다. 실제 민주주의 다양성 지수는 2021년 러시아의 언론 검열 정도가 중국 수준으로 높아졌다고 추정한다.

서방의 제재도, 러시아인의 시민의식도 막지 못하는 전쟁은 군사적으로 끝나야 끝날 듯하다. 이미 사라진 과거를 위해 살아야 할 미래를 죽이는 슬픈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런 슬픈 전쟁이 과연 이번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