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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4세 감독, 소련이 은폐한 살인마 끌어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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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한국·카자흐스탄 합작 범죄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쇄 살인마를 쫓는 베테랑 수사관 스네기래프(이고르 사보치킨)와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아래 사진)의 기록되지 못한 수사 과정을 그린다. [사진 필름다빈]

한국·카자흐스탄 합작 범죄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쇄 살인마를 쫓는 베테랑 수사관 스네기래프(이고르 사보치킨)와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아래 사진)의 기록되지 못한 수사 과정을 그린다. [사진 필름다빈]

“카자흐스탄에선 오히려 이 영화가 ‘이국적’이란 말을 들었어요. 한국 관객은 한국 영화 느낌 난다더군요.”

한국·카자흐스탄 합작 범죄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박루슬란(41) 감독은 “(대사가) 한국말은 아니지만 한국영화”라고 했다. 고려인 4세인 박 감독은 2020년 이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해 “카자흐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평가와 함께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에게 주는 뉴커런츠상을 받았다. 국내 개봉(21일) 다음 날 전화 인터뷰에서 박 감독은 “20년 넘게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해왔다”며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지만, 세계관과 보는 눈, 생각하는 게 한국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그냥 해외에서 태어난 ‘한국 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카자흐스탄 합작 범죄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쇄 살인마를 쫓는 베테랑 수사관 스네기래프(이고르 사보치킨·위 사진)와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의 기록되지 못한 수사 과정을 그린다. [사진 필름다빈]

한국·카자흐스탄 합작 범죄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쇄 살인마를 쫓는 베테랑 수사관 스네기래프(이고르 사보치킨·위 사진)와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의 기록되지 못한 수사 과정을 그린다. [사진 필름다빈]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란 박 감독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10년 넘게 태권도 선수를 하다 부상으로 새로운 길을 찾았고, 그게 영화였다. 우즈베키스탄 사범대 한국어학과 1학년이던 2000년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 어느 날 춘천의 한 영화관에서 불현듯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오랜 기도에 대한 대답 같았죠. 부모님, 친구들도 놀랐죠. 당시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우즈베키스탄에 없는 거나 다름없었거든요.”

한국 영화 ‘괜찮아, 울지마’(2001) ‘나의 결혼 원정기’(2005) 등의 연출부를 거쳐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2012년 고려인의 정체성을 담아낸 성장영화 ‘하나안’이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박 감독 아버지의 고향인 카자흐스탄에서 구소련 시절이던 1979년 벌어진 연쇄 살인마 실제 사건이 토대다. 여성의 목을 자르고 인육을 먹은 범인은 당시 당국이 은폐했고, 38년이 지난 2017년 범인이 직접 쓴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감옥이 아닌 정신병동에 수감된 범인은 자신의 존재가 언론에 노출되길 원치 않는다고 썼다. 박 감독은 “당시 살인마가 네 번이나 탈출에 성공해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까지 도망쳐 왔다”며 “사람을 죽여놓고 ‘나를 기억하지 말라’고 편지를 쓴 것에 기가 막혔고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박루슬란 감독의 촬영 당시 모습. [사진 필름다빈]

박루슬란 감독의 촬영 당시 모습. [사진 필름다빈]

감독 데뷔 후에도 방송국 아르바이트 등 여러 일을 전전했던 그는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초저예산인 제작비 5억원을 발로 뛰어 마련했고, 직접 설립한 제작사 아슬란 필름의 창립작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카자흐스탄 배우들과 현지에서 찍었다. 개봉도 지난달 31일 카자흐스탄에서 먼저 했다.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가 수사 과정에서 세상의 악에 눈뜨며 성장하고, 유일한 가족인 누나 디나(사말 예슬라모바)가 실종돼 고통을 겪는 과정이 영화에서 펼쳐진다.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리바이어던’(2014)으로 주목받은 이고르 사보치킨이 베테랑 수사관 역을 맡아 작품을 중후하게 끌어간다. 실화와 허구의 비율은 3대7 정도라고 한다. 주인공 셰르 남매 등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제 범인을 검거한 형사를 직접 취재해 상황을 생생히 담았다.

코미디가 주를 이루는 카자흐스탄 영화계에서 이 스릴러는 색다른 영화로 받아들여졌다고 그는 전했다. 1970년대 거리를 재현할 제작비가 없어 실내 위주로 찍었다. 그래도 퀄리티를 위해 촬영·조명·동시녹음 등 주요 제작진은 경험 많은 한국 스태프로 꾸렸다. 후반 작업도 한국에서 했다. 넷플릭스 러시아 드라마 ‘투 더 레이크’(2019)로도 얼굴을 알린 일리아소브는 “촬영장 분위기가 내가 해온 작품들과 달랐다”고 영화사에 전했다.

“구소련이 붕괴하고 내가 태어난 나라는 없어졌다”는 그는 지난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며 완전히 귀화했다. 2007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된 어머니도 한국에 와 그와 함께 살고 있다. “인생에서 장점만 생각하려고 해요. 저는 도스토옙스키 원작,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를 번역 없이 볼 수 있고, ‘기생충’도 자막 없이 볼 수 있어요. 다른 세상에서 왔기 때문에 다양한 시선을 갖게 된 건 좀 더 다양한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차기작은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에 관한 영화나 어릴 적 좋아하던 SF 장르로 구상 중이다. 시나리오는 한국어로도, 러시아어로도 쓸 예정이다. 궁극적으론 “흥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제 본질을 100% 다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흥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리 한국 사람들 다 흥이 많죠.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가 숙제지만, 어떤 장르든 살아있는 영화,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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