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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동희의 퍼스펙티브

행복지수 5년 연속 세계 1위 핀란드, 비결은 ‘신뢰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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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핀란드 국민은 왜 행복할까 

장동희 전 주핀란드 대사

장동희 전 주핀란드 대사

핀란드가 또다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됐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3월 18일 ‘2022 세계 행복보고서’를 발표했다.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핀란드가 5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은 146개국 중 59위였다. 한때 휴대전화 업체 ‘노키아의 나라’로 알려졌던 핀란드라고 하면 숲과 호수, 그리고 산타클로스가 먼저 떠오른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북유럽 라이프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마리메코·이딸라 같은 핀란드 디자인 상품도 많이 알려졌다. 유라시아 대륙 너머 8000㎞나 떨어진 북유럽에서도 극지에 있지만, 핀란드 국적 항공기인 핀에어가 서울에 취항하면서 8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다.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핀란드다. 겨울이면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하루 20시간을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하는 곳이다. 녹록하지 않은 자연환경 속에서도 핀란드인들이 지구 위에서 가장 행복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엔 ‘2022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46개국 중 59위에 그쳐
핀란드인, 믿음·신뢰로 타인 평가 … 잃어버린 지갑 되돌아온 비율 1위
정치·노사관계 등 사회 곳곳에 타협문화 정착, 정부는 촉진하는 역할만
실업·질병 대비한 사회보험, 노후 연금, 육아 지원 등 사회보장 갖춰져

가장 먼저 핀란드가 신뢰 사회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핀란드인은 정직하다. 핀란드인이 타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루오테타부스(Luotettavuus), 즉 믿음 또는 신뢰성이다. 몇 년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일부러 지갑을 떨어뜨려 놓고 회송된 비율을 따져 봤더니 핀란드 헬싱키가 1위였다.

지난해 11월 27일 핀란드 전통 크리스마스 축제 개막 행사를 앞두고 코믹하게 분장한 남자가 헬싱키 거리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3월 핀란드는 5년 연속으로 행복지수 세계 1위를 기록했는데 잘 갖춰진 복지제도 외에도 상호 신뢰와 타협의 문화가 주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지난해 11월 27일 핀란드 전통 크리스마스 축제 개막 행사를 앞두고 코믹하게 분장한 남자가 헬싱키 거리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3월 핀란드는 5년 연속으로 행복지수 세계 1위를 기록했는데 잘 갖춰진 복지제도 외에도 상호 신뢰와 타협의 문화가 주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교육제도를 시찰할 목적으로 핀란드를 방문한 한국 국회의원들이 유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여기에는 CCTV를 설치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현지 유아원장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한국과 핀란드를 묘하게 대비시켜 준 한 장면이었다.

필자가 헬싱키 대학교 도서관에 책을 대출받으러 갔을 때의 경험은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도서관 입구마다 설치된 출입 통제장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책을 골라 컴퓨터에 신분증과 책 바코드를 갖다 대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완료됐다. 책을 들고나오는데 아무런 확인절차가 없어서 오히려 어색함과 불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신뢰 사회에서 필자는 이방인이었다.

둘째, 이런 사회적 신뢰는 정부와 국민의 상호신뢰로 이어진다. 핀란드가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영구처리장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핀란드 정부가 2000년 부지를 선정하자 방사성 폐기물 처리 전문회사인 포시바(Posiva)는 지하 520m에 이르는 단단한 암반을 뚫는 굴착공사를 완료했다. 2015년 영구처리시설(Repository) 설치 허가를 받았다. 2024년 운영 개시를 목표로 정부에 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필자는 2013년 핀란드 부임 직후 공사 현장을 방문해 인근 주민들의 반대가 없었는지 물어봤다. 포시바의 부사장은 “부지 선정 이후 정부가 ‘개방성과 투명성’이라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지역 주민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핀란드에서 ‘앵그리 버드’를 개발한 로비오는 물론 ‘클래시 오브 클랜스’의 수퍼셀 같은 정보기술(IT) 벤처 기업이 활성화된 배경에는 창업 지원 기관인 테케스(Tekes·기술혁신지원청)와 신청인 사이의 높은 신뢰 관계가 있다. 창업 지원 제도의 성공 요인을 묻자 현지에서 만난 테케스 청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정성과 투명성’을 거론했다. 로비오가 ‘앵그리 버드’로 성공할 때까지 50여 개의 게임 흥행에 실패했는데, 테케스는 그 중 실패작 5개를 계속 지원했다고 했다. 지원 기관과 신청인 간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셋째, 타협 문화다. 핀란드의 타협 문화는 정치나 노사관계 등 사회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핀란드는 주요 노사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경영자단체와 노조가 자율협상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정부는 세제·사회보장제도 개편 등을 통해 협약 체결을 촉진하는 보완적 역할을 한다. 노·사·정이 법률적 강제 없이 2년마다 성공적으로 새로운 합의를 이끄는 것도 타협 문화가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핀란드의 정치제도를 살펴보자. 핀란드처럼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한 다당제 국가에서는 어느 한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할 수가 없으니 연정 구성이 필수적이다. 총선이 끝나면 제1당을 중심으로 연정 협상이 시작된다. 잠정적 연정 파트너 정당 대표들이 모여 앉아 공동 정강과 정책을 도출한다. 이념 스펙트럼이 완전히 다른 정당들이 공동정책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가히 예술의 경지에 가깝다.

핀란드 의회에는 미래위원회라는 독특한 기구가 있다. 각 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정파를 초월해 진정으로 국가의 미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상임 위원회다. 한국 국회가 이를 본떠서 도입한 것이 국회 미래연구소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이 당리당략을 떠나 국가의 장래를 함께 고민하는 핀란드의 미래위원회와 달리 미래연구소는 국회 산하 하나의 연구기관에 불과하다.

넷째, 교육이다. 핀란드는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공교육이 무상이다. 핀란드는 학업성취도(PISA) 측면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을 유지한다. 하지만 공부를 강제하지 않으며, 무엇이든 자기 책임에 따라 스스로 하도록 유도한다.

사교육 없이 공교육만으로 이러한 학업 성취를 거두는 것이 놀랍다. 핀란드 친구에게 우수한 핀란드 교육의 원천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교사의 우수성, 학교와 교사에 최대한 자율성 보장, 지체아 특별 교육, 팀워크 강조 등을 들었다. 핀란드에서 교사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이다. 교사는 교과서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내용을 가르칠 수 있다. 이 또한 교사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생은 학교에서 팀워크를 통한 문제 해결을 하다 보니 친구와 타협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게 된다. 핀란드의 타협 문화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 함양되는 것이다.

다섯째, 우수한 사회보장 제도와 양성평등이다. 핀란드에는 실업·질병·재난에 대비한 사회보험, 노후 연금, 육아 지원 등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해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복지 철학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 개개인의 일생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의 자립을 돕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핀란드도 낮은 출산율(2020년 1.37명)을 고민하며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육아 지원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산모에게 제공되는 ‘엄마 상자(Maternity package)’라는 것이 있다. 아기 옷가지를 비롯한 유아용품 세트를 담은 상자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제공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인식을 고취한다.

핀란드의 수준 높은 복지는 42.4% (2018년)에 달하는 높은 담세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핀란드 국민 사이에는 조세 저항이 별로 없다. 정부가 세금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잘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활발하다. 2021년 여성 취업률은 71.7%로 남성(72.8%)과 별 차이가 없다. 핀란드는 1906년 뉴질랜드(1893)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허용한 나라다. 여성의 정계 진출도 활발해 2019년 4월 총선에서 여성 의원이 45.5%를 차지했다. 2000년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타르야 카리나 할로넨)을, 2015년에는 여성 국회의장(마리아 로헬라)을, 2019년에는 여성 총리(산나 미렐라 마린)를 선출했다.

끝으로 핀란드의 자연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핀란드에는 18만 개가 넘는 호수가 있고, 국토의 70%가 숲이다. 한국의 3배나 되는 국토에 인구는 550만으로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세 번째로 낮다. 보통의 핀란드인은 숲속 호숫가에 별장 한 채씩을 갖고 있으며 사우나는 필수다. 1년에 최소 한 달 이상을 숲속 별장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즐긴다. 핀란드인이 가장 즐기는 여가 생활은 숲속에서 야생 블루베리와 버섯을 채취하는 것이다. 삶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국민이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2019년 기준 10만 명당 자살자는 15.3명으로 OECD 평균(11.4명)을 웃돌았다. 여유로운 자연환경과 신뢰 사회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 감소가 핀란드인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단조로움과 춥고 어둡고 긴 겨울은 높은 자살률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한다. 세계적 대문호 톨스토이의 말이 생각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장동희 전 주핀란드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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