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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문 추성훈의 인생 경기…"목숨 끊으려던 팬 마음 바꿨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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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의 복귀전에서 승리한 추성훈. 경기 이튿날부터 다시 훈련했다고 했다. 김성룡 기자

2년 만의 복귀전에서 승리한 추성훈. 경기 이튿날부터 다시 훈련했다고 했다. 김성룡 기자

"방금 두 시간 운동하고 왔습니다. 언제든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죠. (웃음)"

2년 만의 복귀전에서 승리한 추성훈(47·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에게 '한 일주일쯤 푹 쉬었냐'고 묻자 "경기 다음 날부터 다시 훈련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1975년생, 만 47세로 격투기 선수로는 할아버지 격인 추성훈을 지난 22일 서울 신사동에서 만났다. 추성훈은 "나는 20대 선수와 달리, 시간이 많지 않다. 이 나이에 넋 놓고 쉬면 다시 컨디션과 체력을 끌어올리기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딸 추사랑(왼쪽)에게 승리 메달을 선물한 추성훈. [사진 추성훈 인스타그램]

딸 추사랑(왼쪽)에게 승리 메달을 선물한 추성훈. [사진 추성훈 인스타그램]

그는 이어 "옥타곤(8각링)에서 이겼을 때의 쾌감은 내가 좋아하는 술과 라면 등과 맞바꿀 만하다. 닭가슴살 먹다 소고기를 맘껏 먹은 게 경기 후 가장 큰 일탈"이라며 웃었다. 재일동포 출신 추성훈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남자 81㎏급 금메달리스트다. 2004년 은퇴 후 격투기로 전향했다.

유도 선수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타격 능력이 출중해 승승장구했다. 2009년 ‘격투기의 메이저리그’ UFC에 진출해 전성기를 달렸다. 지든 이기든 화끈한 난타전을 벌여 큰 인기를 얻었다.

 추성훈은 예상을 뒤엎고 챔피언 출신 아오키 신야에 역전승을 거뒀다. [사진 원챔피언십]

추성훈은 예상을 뒤엎고 챔피언 출신 아오키 신야에 역전승을 거뒀다. [사진 원챔피언십]

추성훈은 지난달 26일 싱가포르 칼랑의싱카포르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원챔피언십 ONE X 대회 종합격투기 라이트급(77kg급) 경기에서 아오키 신야(39·일본)를 2라운드 TKO승으로 이겼다. 라이트급 챔피언 출신 강자 아오키(현 3위)에 고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최근 경기인 2020년 2월 셰리프 모하메드 전에선 1라운드 KO승을 거둔 추성훈은 2년 만의 복귀전도 KO로 이기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추성훈은 "2003년 유도 세계선수권 이후 19년 만에 다시 전성기를 맞은 느낌"이라고 했다. 김성룡 기자

추성훈은 "2003년 유도 세계선수권 이후 19년 만에 다시 전성기를 맞은 느낌"이라고 했다. 김성룡 기자

1라운드에서 아오키의 일방적인 초크 공격을 견뎌낸 추성훈은 2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55연타 펀치 세례를 퍼부으며 역전 드라마를 썼다.

추성훈은 "아오키가 그래플링(메치기·태클·꺾기) 초고수라서 태클 방어 훈련만 두 달간 수천 번 했다. 그런데 경기 시작 30초 만에 아오키에게 초크(목 조르기) 공격을 당해 꼼짝 못 하는 상황이 됐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1라운드에만 두 차례나 탭(경기 포기) 하려 했다. '이 나이에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져도 욕할 사람 없겠다. 고생한 게 아깝지만 이쯤에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포기하려던 추성훈은 일으켜 세운 건 팬들의 응원이었다. 김성룡 기자

포기하려던 추성훈은 일으켜 세운 건 팬들의 응원이었다. 김성룡 기자

쓰러져 가던 추성훈을 일으켜 세운 건 팬들의 목소리였다. 1라운드 후반 관중석에선 "섹시야마(추성훈 별명)"를 외치는 일방적인 응원이 펼쳐졌다. 추성훈은 "숨을 못 쉬어 기절 직전이었다. 그때 나를 연호하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여기서 관두면 멋도 없고, 팬들에게도 미안할 것 같아 이 악물고 버텼다. 1라운드가 끝나자 아오키 눈빛엔 자신감이 사라졌더라. 이때다 싶어 2라운드에 모든 것을 쏟았다"며 역전의 비결을 밝혔다.

추성훈은 아오키전을 준비하며 그 어느 때보다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웰터급(84㎏) 선수로 평소 체중이 90㎏인 그는 아오키 체급에 맞추기 위해 13㎏를 감량했다. 일본 유도 남자 국가대표 하시모토 소이치(73㎏급) 등과 함께 매일 달리기와 웨이트 트레이닝 등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13kg 감량해 경기에 나선 추성훈. [사진 원챔피언십]

13kg 감량해 경기에 나선 추성훈. [사진 원챔피언십]

타격가인 그는 아오키의 그래플링에 대응하기 위해 밴디지(손가락 테이핑)도 포기했다. 밴디지는 타격 위주 선수들에겐 필수다. 손가락을 보호해주는 동시에 주먹에 힘을 싣는다. 추성훈은 "내겐 타격이 무기고, 아오키를 쓰러뜨리는 방법은 KO뿐인데, 밴디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조심스럽게 경기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렀는데, 이번이 내 격투기 인생 최고의 경기였다. 최선을 다해준 아오키가 고맙다"고 말했다. '만약 2라운드에 이기지 못해 3라운드를 치러야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라고 물었다. 추성훈은 망설임 없이 "3라운드를 했다면 내가 졌을 것"이라고 답했다.

목숨을 끊으려 했던 한 팬은 추성훈의 투지 넘치는 경기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김성룡 기자

목숨을 끊으려 했던 한 팬은 추성훈의 투지 넘치는 경기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김성룡 기자

추성훈의 승리는 한일 양국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됐다. 추성훈은 "경기 후 일본 팬들에게 수천 통의 소셜미디어(SNS) 메시지를 받았다. 6시간 동안 꼼짝 않고 답장만 했는데도 전부 답변하기엔 부족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추성훈은 안 될 것'이라는 편견을 깨줘서 고맙다. 덕분에 나도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내가 아오키에게 지기 바라던 많은 안티 팬들이 사라져서 신기했다. 90% 이상의 메시지가 나를 응원하고 축하는 글이었다. 하루 아침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 진심을 사람들도 알아줘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추성훈은 "내 또래 중년 팬의 글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사업에 크게 실패해 희망이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한 직후 당신 경기를 봤다. 열정과 끈기에 감복해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며 고마워하더라. 또 다른 팬은 '암투병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는데, 경기를 본 뒤 병마를 이길 때까지 싸우기로 했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폭풍 펀치에 맞고 쓰러진 아오키 안면에 피니시를 꽂는 추성훈. [사진 원챔피언십]

폭풍 펀치에 맞고 쓰러진 아오키 안면에 피니시를 꽂는 추성훈. [사진 원챔피언십]

가장 친한 후배 격투기 선수 김동현(42)도 추성훈의 경기를 보며 심경의 변화가 왔다. UFC 웰터급 랭킹 7위였던 김동현은 2017년 이후로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뭉쳐야 찬다' 등 예능 프로를 누비고 있다. 추성훈은 "동현이도 내 경기를 보며 다시 싸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더라. 지금은 방송에서 맹활약 중이지만, 파이터 시절 이긴 뒤 전율을 나를 통해 느낀 모양"이라고 말했다.

추성훈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난생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그는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강연을 통해 도전의 연속이었던 내 인생 스토리를 전하겠다. 내가 누군가의 영감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성훈(왼쪽)은 딸 추사랑과 함께 캠핑 여행을 준비 중이다. [중앙포토]

추성훈(왼쪽)은 딸 추사랑과 함께 캠핑 여행을 준비 중이다. [중앙포토]

딸 추사랑(11)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성훈은 "초등학교 4학년인 사랑이는 내 경기를 안 봤다. 아빠가 맞는 것도 때리는 것도 싫어서다. 퉁퉁 부은 얼굴로 집에 온 아빠를 보고 울었다. 사랑이에게도 아빠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라고 덧붙였다.

아내이자 일본인 톱 모델 야노 시호(46)는 든든한 후원자다. 추성훈은 "아내는 내가 겪은 모든 일을 곁에서 지켜봤다. 새로운 도전을 항상 응원한다"고 말했다. 추성훈은 야노와 2009년 결혼했다.

추성훈 아내이자, 일본인 모델 야노 시호,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다. [중앙포토]

추성훈 아내이자, 일본인 모델 야노 시호,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다. [중앙포토]

추성훈은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한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자주 쇼핑하고, 화려한 옷을 즐겨 입는다. 일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패션 브랜드도 론칭했다. 재치있는 입담으로 일찍부터 한·일 방송가를 누볐다. 아오키를 비롯한 일부 팬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무도가답지 않다'고 지적했다.

추성훈은 "신경 안 쓴다. 격투기와 올림픽과 달리, 스포츠엔터테인머트 사업이다. 열심히 운동하고, 패션과 방송을 즐기면 된다.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아오키가 나처럼 못하기 때문이다. 아오키도 능력이 된다면 패션쇼, 예능 프로도 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내 이름을 건 격투 서바이벌 쇼를 진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50세 챔피언을 꿈꾸는 추성훈은 올해 안에 다시 옥타곤에 서는 것이 목표다. 김성룡 기자

50세 챔피언을 꿈꾸는 추성훈은 올해 안에 다시 옥타곤에 서는 것이 목표다. 김성룡 기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추성훈의 도전은 계속된다. 그는 50세까지 싸우는 게 꿈을 꾼다. 최종 목표는 챔피언이다. 추성훈은 "2003년 유도 세계선수권 당시가 내 운동 인생에서 가장 컨디션 좋고 자신감 넘쳤던 시기다. 정확히 19년 만에 그때 기분이 다시 들었다. 전성기를 다시 맞은 느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빨리 경기를 하고 싶다. 올해 하반기 한국 대회를 개최해 내가 출전하는 것을 원챔피언십과 상의 중이다. 그다음엔 챔피언 도전이 목표다. 은퇴까지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욕심이 많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려던 찰나, 추성훈은 "챔피언이 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깜빡했다"고 말했다. 딸과 약속이었다. 그는 "사랑아, 조만간 아빠랑 한국에서 캠핑카 타고 전국 팔도 돌며 맛있는 거 먹자. 데이트 해줄 거지?"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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