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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도 재능"…5년 운둔, 시력 잃어가는 작곡가 지켜준 '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시각장애인 작곡가 임채섭씨. 사진 본인 제공

시각장애인 작곡가 임채섭씨. 사진 본인 제공

“저희는 꽤 오랜 시간 진주를 만들고 있던 사람들이죠.”

시각장애인 임채섭(40)씨가 ‘장애인의 날’인 지난 20일 “장애도 재능”이라며 한 말이다. “조개에 상처가 나면서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장애인도 마찬가지”라면서다.

빛만 간신히 분간할 정도로 시력이 나쁜 임씨의 직업은 작곡가다. 앞이 잘 안 보이는 탓에 듣고 또 들으며 작곡하는 게 최선인 그다. 비장애인 작곡가보다 작업 시간이 3~4배 더 걸린다. 주로 청각에 집중해 작곡하다 보니 청력도 일반인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임씨는 “남들보다 느리지만, 남들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장애도 재능” 시각장애인 작곡가

시각장애인 작곡가 임채섭씨. 사진 본인 제공

시각장애인 작곡가 임채섭씨. 사진 본인 제공

임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사고로 왼쪽 눈 시력을 잃었다. 오른쪽 눈은 희소병인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진행성 질병이라 임씨의 시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실명 당시 좌절의 끝자락에서 찾은 건 작곡이라는 희망이었다. ‘남들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이 ‘나만의 재능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으로 변하면서다. 임씨는 학창 시절 홀로 작곡을 공부해 부산대 작곡과에 진학했다. 학교 도움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은 ‘장애인 1호 장학생’이었다고 한다. “학비는 해결했지만, 생활비에 쪼들려 방문 판매나 군고구마 장사 등 온갖 궂은일을 다 했어요. 시각장애인을 써주는 데가 없으니까요. 제 삶은 ‘서바이벌’ 그 자체였죠.”

“환경만 주어진다면 꿈꿀 수 있다”

첨단보조기구 '조디'를 착용한 임채섭씨. 사진 '따뜻한 동행'

첨단보조기구 '조디'를 착용한 임채섭씨. 사진 '따뜻한 동행'

대학 졸업 후 드라마·종교 음악 등을 만들며 작곡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임씨는 2017년 돌연 작곡을 멈췄다. 가까스로 이어오던 작업이 더는 불가능할 정도로 시력이 나빠져서다. ‘여기까지가 끝’이라는 막연한 공포감이 그를 덮쳤다.

임씨는 5년 가까이 작곡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 파를 기르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파의 생명력을 느끼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만 말자’는 생각만으로 겨우 살아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시간을 흘려보내던 임씨는 우연히 장애인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의 사업 공고를 접했다. 잠재력 있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구를 맞춤으로 지원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사업 문을 두드린 그는 ‘따뜻한동행’으로부터 ‘조디’라는 첨단보조기구와 작곡에 필요한 컴퓨터·키보드 등을 지원받게 됐다. 조디를 쓰면 광학이 30배 정도 확대돼 2m 거리에서 40인치 TV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단순히 ‘힘내라’는 말보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니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났다”는 게 임씨의 말이다.

임채섭씨 등이 작곡한 ‘WE(With Equality)’ 를 배우 최태환(왼쪽부터), 가수 이소정, 배우 최성원이 부르고 있다. 사진 '따뜻한 동행' 유튜브 캡처

임채섭씨 등이 작곡한 ‘WE(With Equality)’ 를 배우 최태환(왼쪽부터), 가수 이소정, 배우 최성원이 부르고 있다. 사진 '따뜻한 동행' 유튜브 캡처

5년간의 은둔생활을 끝낸 임씨는 비장애인 2명(서재윤·황영훈)과 작곡 팀을 꾸리고 다시 세상에 나서려고 한다. 그 시작으로 ‘마음먹은 그대로 이룰 수 있다’는 염원을 담아 음원 ‘WE(With Equality)’를 최근 발표했다. 장애 없는 세상을 노래한 이 곡에는 시각장애인 가수 이소정과 배우 최성원·최태환이 참여했다.

임씨는 “장애인도 환경만 주어진다면 다시 꿈꿀 수 있고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음악을 만들라”는 아버지 유언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그의 앞으로 꿈이자 목표다.

작곡팀 '티스푼'의 서재윤 작곡가(왼쪽)와 임채섭 작곡가. 사진 채혜선 기자

작곡팀 '티스푼'의 서재윤 작곡가(왼쪽)와 임채섭 작곡가. 사진 채혜선 기자

임씨의 작곡 팀 이름은 ‘티 스푼’이다. 한 스푼 두 스푼 서로를 돕는다는 뜻에서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티 스푼 멤버인 작곡가 서재윤씨는 ‘장애인과 같이 활동해 불편함은 없는지’ 등을 묻자 “임 작곡가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늘 까먹고는 한다”며 웃었다. “장애 때문에 배려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예요. 저희와 다를 게 없어요.”

서씨 말에 임씨는 이렇게 화답했다. “장애는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장애를 그저 특성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22 ‘따뜻한동행’ 첨단보조기구 지원사업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은 2010년부터 장애인 첨단보조기구 지원사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약 198명에 이르는 장애인에게 도움을 줬다. 오는 5월 31일까지 올해 사업의 지원자를 신청받는다. 선정 기준은 ‘향후 성장·발전 가능성’ 등이다. 당사자 협의 등을 통해 첨단 의·수족이나 전동휠체어 등 개인에게 필요한 첨단보조기구를 지원한다. 임씨는 “장애로 인해 불편한 것들만 해결된다면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똑같은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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