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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탈원전 정책 전환, 경제안보 차원의 접근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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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2021년 기준 33개국이 원자력발전(원전)을 하고 있다. 발전량 기준 미국(94기), 프랑스(56기), 중국(50기), 일본(33기), 러시아(38기), 한국(24기)순이다. 선진국과 동구권 일부 국가가 도입한 후 최근 개도국에서 확대 추세다(총444기). 1978년 원전 보유국이 된 한국은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으로 2009년 6번째 원전 수출국이 됐다.

원자력 상업발전의 효시는 1958년 미국 쉬핑포트 원전이다. 노형은 최초의 핵잠수함 노틸러스호에 장착한 원자로를 개량한 가압경수로였다. 노틸러스호는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UN총회에서 제안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의 첫 결실이었다. 미소 냉전에서 원자력이 승부수가 될 것이라는 자문을 받아들인 그는 1949년 구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등 냉전 상황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리더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냉전시대 미국의 원자력 외교전략
TMI 사고 이후 원전산업 침체
지금은 원전 운영 기술역량 강화
한·미 원자력 협력 끌어 올려야

원전정책을 외교전략으로 택한 미국은 1954년 타국과 원자력협정 체결과 민간기업 원자력산업 참여가 가능하도록 원자력법을 개정한다. 1957년에는 원자력 관리에 대한 감시 수용을 전제로 어느 나라에든지 원자로를 제공하고 원전사고 피해보상을 하도록 프라이스-앤더슨법을 제정한다.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 협력 협정’ 체결은 1956년의 일이었다.

원전산업은 1960년대 기술 진보와 경제성 향상, 에너지 수요와 유가 급등에 힘입어 세계로 확산된다. 1973년 석유파동이 일자 가장 값싸고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우뚝 선다. 그 ‘꿈의 에너지’가 공포의 이미지로 급전직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9년 3월 28일 미국 스리마일섬(TMI) 원전사고였다. 그러나 핵연료 노심용융이 일어난 사고였음에도 인명피해는 없었다. 1미터 두께의 격납용기가 재앙을 막았기 때문이다. 사고 나흘 뒤 카터 대통령 내외는 현장을 찾아 시설을 둘러본다. 핵잠수함 프로그램의 엔지니어를 지낸 카터는 정치인으로서 “미국은 신규 원전을 짓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원자력 공포를 더 악화시킨 것은 영화 ‘차이나 신드롬’이었다. 하필 최악의 노심용융 사고를 그린 재난스릴러가 개봉된 지 12일 뒤 진짜 사고가 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마그마 덩어리는 지각(地殼)으로 침투해 중국까지 흘러간다. 중국은 미국의 정반대쪽에 있지도 않거니와 시나리오도 허구였다. 그러나 픽션과 논픽션이 중첩되면서 공포심리를 증폭시켰다.

1979년 미국은 원자로 43기 가동에 129기 신규건설을 승인한 상태였다. 사고 이후 신규계획은 취소되고 건설 중이던 53기만 계속 짓는다. 가장 큰 타격은 원전기술과 안전관리에 대한 신뢰의 추락이었다. 그 여파로 미국에서는 2012년에서야 신규 원전허가가 나온다. 원전 종주국이자 최고의 기술강국에서 기술위험이 컨트롤되지 못한다는 충격으로 세계 원전산업은 된서리를 맞는다. 설상가상 1986년 최악의 체르노빌 사고가 터진다.

원자력은 정치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다. 부시 행정부는 친원전정책을 폈으나, 오바마 행정부는 제동을 걸었다. 2009년 프라하에서의 핵 비확산 의지 표명과 함께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한 유카 마운틴 프로젝트 예산을 비롯해 ‘원자력 수소 이니셔티브’와 ‘제4세대 원자력 시스템 이니셔티브’ 국제협력 예산도 삭감된다.

미국의 가동 원자로 기수는 2012년에 102기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다. 그 배경은 천연가스 가격 하락, 재생에너지 보조 확대, 안전규제 강화로 경제성 악화, 민영화 체제에서의 사업 불확실성 등 복합적이다. 주목할 것은 기존 원전의 효율 개선과 출력 증강이 획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1990~2010년 설비용량 증가는 1.5%였다. 그럼에도 이용률, 열효율 개선, 출력 증강으로 원전 발전량은 40% 증가했다. 1000메가와트 원자로 29기 건설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에너지원이 풍부한 미국은 원전정책이 오락가락해도 안보 위협은 없다. 그러나 한국은 달라서, 경제안보를 위협한다. 탈(脫)탈원전 정책 전환도 그동안의 산업 생태계 붕괴로 험로가 예상된다. 설계수명 연장도 간단치 않다. 고리 1호기는 10년 연장해서 2017년 영구정지됐다. 기술적·경제적으로 20년 이상 계속운전이 가능하다는 평가였으나, 10년으로 결정됐다. 전원이 12분간 완전 상실되는 사고가 뒤늦게 알려지는 사건도 있었다. 수명 연장을 위한 철저한 기준을 맞추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고, 안전성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도 각오해야 한다.

미국의 원자력 전략 비전은 시사적이다. 원전의 경제성 악화와 설계수명 도래로 인한 경쟁력 약화를 극복하고 원자력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대형 원전의 계속운전 유지, 차세대 원자로 실증, 차세대 연료주기 개발 등을 추진하고 있다. 테라파워의 나트리움 프로젝트, X-에너지의 수소 생산 초소형 상업로, 뉴스케일의 SMR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탄소중립을 외치던 세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등 총체적 리스크에 직면했다. 선진국발 경제안보가 강조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한미 원자력 협력을 기술안보와 경제안보 차원의 한미동맹 전략분야로 끌어올리는 외교전략이 작동되기를 기대한다.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