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향은의 트렌드터치

마이크로 유목의 시대, 워케이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

이탈리아 밀라노에선 금요일에 학교를 결석하고 롱 위크엔드로 여행을 가도 수업일수로 인정해주는 ‘바캉스 교육’이 보편화되어 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며 놀게 하는 것이 학습할 때 집중력과 몰입력을 높여준다고 믿는 이탈리아 부모들이 만든 교육법이다. 마치 바캉스 교육처럼 갑갑한 오피스 빌딩이 아닌 뷰가 있는 로케이션에서 최대한 자연의 풍광을 즐기며 노는 듯 일하는 워케이션이 등장했다. 휴양지에 머물며(vacation) 원격으로 일하는(work) 워케이션(workcation)은 훌륭한 IT인프라에 코로나19로 완벽한 예행연습까지 마친 후 가파른 속도로 퍼져가는 추세다.

우리 사회에서 ‘여유’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워라밸족이 만들어낸 일과 삶의 균형은 5도 2촌으로 진화했다.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촌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익숙해진 재택근무 덕에 장소의 유연함이 생기자 이들의 욕망은 원격근무로 이어졌다. 1인당 GDP 3만5000 달러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허리 MZ들의 일에 대한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괴로움을 인내하며 성장하는 것보다 현재의 행복과 안위를 찾는 세대적 특성도 있겠지만 창의적 비즈니스 모델의 등장, 파괴적 혁신, 디커플링과 같은 경영환경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빠른 태세전환과 적응에 능해졌다.

재택근무에서 원격근무로 이동
자연 속에서 노는 듯 일하는 듯
기업마다 거점오피스 늘려나가

워케이션.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워케이션.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업무효율과 자존감을 모두 높이기 위해 유유자적한 곳을 원하는 이들은 치열함 속에 방전된 영혼을 채우는 시간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로망을 실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에게 일은 생계보다 자아실현이자 일상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필요조건이다. 시가총액 50조를 자랑하는 국내 굴지의 IT기업 네이버의 1981년생 대표는 인사의 파격성만큼이나 혁신적인 제도를 발표했다. 3년 이상 근속자에게 6개월간 무급휴직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쉬는 것에 방점을 찍기보다 일에 대한 보상 그리고 재충전의 시간을 인정했다는 데서 젊은 대표의 참신성이 돋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일하는 방식은 형식도 인식도 모두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커피를 마시러 오는 것을 넘어 세련되고 활기찬 오픈 독서실 분위기를 향유하러 오게 하는 ‘제3의 공간전략’을 구사한 스타벅스의 성공을 보면 워케이션 트렌드는 예견돼 있었다. 공간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설이다. 미국의 유니콘 기업들이 차고에서 시작된 것처럼 가라지(garage) 문화가 일군 스타트업 토양은 일하는 환경이 창의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수차례 방증해왔다.

아파트 공화국인 한국엔 차고가 없으니 사람들은 집과 학교 혹은 직장이 아닌 제3의, 제4의 공간을 찾아 밖으로 나선다. 몇 년 전만 해도 사옥이 있는 건물로 출근하고 싶고, 높은 층고에 대리석 두른 으리으리한 로비며 휴게공간이 특화된 오피스 공간이 로망이던 때가 있었다. 영화 ‘인턴’에 나오는 로프트 공간을 선망하며 자율좌석제와 협업을 위한 모듈 가구를 활용해 최대한 자유스러운 인테리어의 사무환경을 조성하는 데 투자하던 발 빠른 기업들이 거점오피스 활성화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미 아마존을 포함한 유명 글로벌 회사들은 원격근무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민첩한 기업들을 필두로 워케이션 채비에 나섰다.

CJ ENM은 지난해 제주도 월정리에 거점오피스를 마련하고, 시범 운영한 ‘제주에서 한 달 살며 근무하기’를 정규 인사제도로 운영키로 했다. SK텔레콤은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워커힐 호텔에 워케이션 콘셉트의 거점오피스를 오픈했고, 롯데멤버스도 제주에서 시작한 워케이션을 속초·부산까지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은 과밀한 주거·업무 환경에서 고통받는 도시민에게나 고령화와 공동화 현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지자체 모두에게 희소식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여행을 생활화하는 라이프스타일, 높은 통신인프라를 자랑하는 환경의 삼박자에 맞추어 워케이션 트렌드가 가속화되고 있다.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에 따르면 인간은 호모 노마드(Homo Nomad 유목하는 인간)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지구를 떠돌아다닌 인류의 유목역사 600만년 앞에 정착의 역사는 고작 6000년 남짓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재돼 있는 유목민의 본성이 오늘날 디지털 세계까지 확장한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여행하듯 일하는 자발적 방랑자들의 21세기 유목이 시작되고 있다.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