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수정의 시선

벅찬 기억과 경의 가득한 친서 유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5년간 혼란 잊은 남북 정상  

우크라전쟁 이후 독재-민주 싸움  

북한 비핵화·인권 함께 가야 공존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옴니버스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주제는 이어지고 캐릭터와 배경은 같은데 폭발음과 거친 욕설이 난무하는 누아르 에피소드에서 대단원엔 '착한' 두 남자가 벅찬 감동을 회고하며 정을 나누는 그런 드라마.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한 달 앞둔 지난 20일 "마지막 인사를 겸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친서, 하루 뒤 김정은이 보낸 답신이 그간 현실과 대비돼 든 생각이다. 22일 남북은 각각 친서를 공개했다. 김정은은 "민족 대의를 위해 마음 써 온 문 대통령의 고뇌와 수고,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퇴임 후에도 변함없이 존경할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아쉬운 순간들이 벅찬 기억과 교차하지만, 김 위원장과 한반도 운명을 바꿀 확실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한다. 대화로 대결의 시대를 넘어야 하고, 북미 간 대화도 조속히 재개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남북정상회담 이틀째인 2018년 9월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와 함께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입장한 뒤 시민들의 환호에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을 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남북정상회담 이틀째인 2018년 9월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와 함께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입장한 뒤 시민들의 환호에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을 했다. [중앙포토]

 문 대통령이 언급한 '벅찬 기억'은 아마 김정은·트럼프 회담과 평창 올림픽,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스스로를 "남쪽 대통령"으로 소개하며 행한 연설일 게다. 무대는 화려했다. 그러나 "김정은의 핵폐기 의사가 분명하다"며 미국을 설득해 이뤄진 북·미 정상회담은 실패했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란 이름으로 올인했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한계선에 이르렀고, 김정은 동생 김여정이 문 대통령에 쏟아낸, '존경'과는 거리 먼 막말은 '웃픈 유행어'가 됐다. 세금 700억원이 투입된 개성연락사무소를 부숴도, 우리 공무원을 죽이고 불태워도 항의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탈북 어민은 눈가리개를 씌워 북한 요구대로 넘겨줬다.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대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를 국제사회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지켜봤다. 벅찬 기억 저편, 국민 뇌리에 남은 일들이다.
 최근 문 정부는 북한 도발에 국가안보회의(NSC)를 수시로 열고 "미사일 발사 징후가 명확하면 발사 원점, 지휘·지원시설을 정밀 타격할 능력·태세를 갖추고 있다"(서욱 국방장관)는 '선제타격론'까지 언급했다. 이전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떠나는 문 대통령의 '기록용' 급변침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는 와중에 다시 덕담 친서를 주고받았다. 북한이 풍계리에서 핵실험을 준비하는 정황이 속속 나오는 상황. 최근 북한의 도발과 관련한 문 대통령의 주문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화를 통해 역경을 넘어서자"고 한 말에 그 뜻이 담겼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최소 27통의 편지(그 중엔 문 대통령의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고 한 것도 있다)를 보낸 김정은이 남북 대화 재개 의지 등이 담긴 친서를 바로 공개한 건 향후 긴장이 조성되면 새 정부 탓으로 돌리고, 남한 진보 진영과는 협력 여지를 남겨두려는 차원일 거다. 문 대통령은 끝까지 남북 평화에 힘쓴, 김정은으로부터 존경받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원한 것 같다.
 문 대통령은 대중국 외교에서도 '저자세' 비판을 들었다. '혼밥' 논란은 차치하고 중국 방문길을 수행한 기자들이 공안에 폭행당해도 항의하지 않았다. 대통령 지지자들이 오히려 피해 기자들을 댓글로 공격했다. 수모는 오롯이 국민의 몫, 추락한 건 국격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한반도의 전략적 안보 지형은 바뀌고 있다. 권위주의 국가 대 민주 진영 대결 구도가 강해지면서 북·중·러는 더 결속하고, 따라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저지는 더 어려울 전망이다. 최근 열린 최종현학술원-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선 "중국이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할지도 의문"(수미 테리 우드로윌슨센터 국장), "김정은이 우크라이나에서 얻은 가장 나쁜 교훈은 푸틴이 핵 선제공격 협박으로 미국, 나토의 군사 개입 저지에 성공한 것"(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 특보)등 주장이 나왔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국제정치에선 어느 국가 군대가 승리하느냐보다 어느 국가의 스토리가 승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동풍(중국 등 권위주의 진영)이 서풍(자유민주진영)을 압도할 것이란 신화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세계 GDP의 50%를 차지하는 민주 진영이 GDP 20%(중국+러시아)인 권위주의 축에 맞서 버텨낼 여력이 있다면서다.
 전쟁 상흔을 딛고 세계 경제 10위권 민주 국가로 성공한 한국은 보편 가치를 누구보다 더 당당히 얘기하고 공존과 국익을 도모할 수 있는 나라다. 특히 북한과의 본질적인 평화 공존은 북한 비핵화, 인권 등을 꾸준히 제기하고 문제가 개선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북한에 마땅히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을 했다면 존경과 우애 넘치는, 공개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듯한 퇴임 친서가 이처럼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