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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그플레이션’ 현실화…재정·통화 ‘엇박자’에 해법은 난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의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가 아시아 선진국 대열에서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물가는 올라가는데 경기는 하강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다음 달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고물가와 저성장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됐다.

24일 기획재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IMF는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을 통해 한국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4.0%로 전망했다. 이는 아시아 선진국 8개국 평균인 2.4%보다 1.6%포인트 높다.

아시아 선진 8개국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아시아 선진 8개국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IMF가 선진국으로 분류한 전 세계 약 40개국 가운데 아시아 국가는 한국과 일본ㆍ대만ㆍ호주ㆍ싱가포르ㆍ홍콩ㆍ뉴질랜드ㆍ마카오 등 8개국이다. 이들 중 한국보다 물가 상승률 전망치가 높은 나라는 뉴질랜드(5.9%)뿐이다. 마카오(2.8%)와 대만(2.3%)의 올해 물가 상승률은 2%대, 홍콩(1.9%)과 일본(1.0%)은 1%대로 비교적 안정적일 것으로 전망됐다.

IMF의 직전 전망 시점인 지난해 10월과 비교하면 한국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기존 1.6%에서 2.3%포인트나 올라갔다. 뉴질랜드(3.7%포인트)에 이어 역시 두 번째다. 이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대만ㆍ마카오가 각각 0.8%포인트, 일본은 0.4%포인트 올라가는 데 그쳤다. 홍콩은 되려 0.2%포인트 내려갔다.

정부는 미국·유럽보다 물가 상승률이 낮다며 한국이 상대적으로 선방하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러시아ㆍ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역ㆍ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낮은 아시아 진영에선 한국이 상당한 타격을 입는 국가로 분류되는 것이다.

아시아 선진 8개국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아시아 선진 8개국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기에 주요 기관이 예측한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2%대로 낮아지고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대외 경제 변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원자재 등의 공급이 불안해지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는 빅스텝(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여기에 세계 최대 중간재 공급처인 중국의 록다운까지 겹치며 세계 경제에 어두운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어서다.

IMF는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5%로 제시했는데, 아시아 선진국 8개국 평균(2.8%)보다 낮다. 한국 아래로는 코로나19·미중분쟁 등으로 경제 충격을 받은 홍콩(0.5%)과 한국보다경제규모가 3배 이상 큰 일본(2.4%) 두 나라뿐이다.

문제는 저성장ㆍ고물가 현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IMF는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 악화, 대 러시아 제재 확대, 치명적인 바이러스 변이에 의한 코로나19 대유행 가능성 등으로 글로벌 경제전망에 대한 하방 위험이 지배적”이라고 밝혔다. 허장 IMF 상임이사는 “현재 인플레이션은 구조적 문제”라며 “우크라이나 사태가 끝나도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은 당분간 이어진다”고 했다.

주요 기관 2022년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주요 기관 2022년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새 정부에서는 고물가ㆍ저성장이 얽힌 고차 연립방정식 풀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벌써부터 재정 당국은 돈을 풀고, 통화 당국에서는 돈줄을 죄면서 재정ㆍ통화 엇박자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소상공인 손실보상 종합 패키지’를 오는 25일 발표한다. 이를 뒷받침할 2차 추가경정예산(추경)안 규모도 함께 확정한다. 당초 예상(50조원)보다 줄어든 30조원 규모가 유력하지만, 대규모 추경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역대 최대였던 2020년 3차 추경(35조1000억원)과 맞먹는다. 30조원 넘는 돈이 5~6월 이후 추가로 풀리면 이미 치솟은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다.

이미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유가·원자재 가격이 오르는 가운데, 최근 잠잠했던 달걀(계란) 등 농축수산물 가격도 오를 조짐이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22일 특란 한판(30개) 평균 소비자 판매 가격은 7010원으로 전월(6358원)대비 10.3% 올랐다. 달걀 한판 가격이 7000원을 넘은 것은 축산물품질평가원 통계 기준 지난해 8월 4일(7038원) 이후 약 8개월 만이다. 한국무역통계진흥원에 따르면 지난달 농축수산물 수입가격지수도 119.2(2015=100)로 전년대비 32.4%, 전월보다 5.9% 올랐다. 전년대비 기준으로는 지난해 12월 이후 4개월 연속 30%대 상승세다.

서울 지역 주요 외식품목 1년새 얼마나 올랐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서울 지역 주요 외식품목 1년새 얼마나 올랐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돈 풀기를 예고한 새 정부와 달리 한은은 시장에 꾸준히 ‘긴축’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앞서 14일 총재가 공석인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1.5%로 올렸을 만큼 한은은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창용 한은 신임 총재의 언급처럼 연내 추가 금리 인상도 기정사실이다. 물가 상승 속도가 잦아들지 않는다면 한은의 추가 금리 인상이 따라 한 차례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2014년 이후 8년 만에 기준금리 연 2% 시대가 열릴 수 있다.

결국 정부가 직접 나서 수십조원에 달하는 유동성을 시중에 공급하는데, 통화 당국에서는 유동성을 회수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미스매칭’이 벌어지게 되는 셈이다. 재정과 통화정책이 엇박자를 내면 정책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전반적인 정책 운용은 경기 진작보다는 물가 안정에 무게를 둬야 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구조 개혁을 통한 저성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14년 만에 물가 상승률 최고.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14년 만에 물가 상승률 최고.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새 정부는 에너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 상승이 물가상승으로 연계되지 않도록 공급중심 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며 “코로나19 및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는 계층을 중심으로 지원하되, 기존의 재정지출을 구조조정해 유동성 확대를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장기적으로는 규제 혁파와 제도 개혁으로 혁신생태계를 형성해 생산성 향상과 생산원가 감소를 통해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하도록 하는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물가 상승은 조기 진화하지 않으면 잡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약간의 성장률 둔화를 감수하더라도 물가를 먼저 잡아야 한다고 본다”며 “성장률과 물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중앙은행과 정부가 진짜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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