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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팩’ 창립 멤버들과 30여 년 교류, 아시아영화 발전 힘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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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호 19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6〉 ‘넷팩’ 친구들

영화제집행위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마샬 크나벨(스위스 프리부르), 아루나 바수데프(오시안즈시네팬), 김동호(부산), 지넷 폴슨(하와이), 필립 쉬아(싱가포르). [사진 김동호]

영화제집행위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마샬 크나벨(스위스 프리부르), 아루나 바수데프(오시안즈시네팬), 김동호(부산), 지넷 폴슨(하와이), 필립 쉬아(싱가포르). [사진 김동호]

1990년 8월 24일 나는 소련의 알마티(당시엔 러시아어로 알마아타)와 타슈켄트에서 ‘한국영화주간’ 행사를 마치고 정진우 감독, 강대선 이사장, 정윤희 배우와 헤어져 인도로 향했다. ‘아시아 실험영화와 비상업영화의 진흥과 배급을 위한 아시아네트워크의 창설에 관한 아시아 지역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인도 영화잡지 시네마야의 발행인 겸 편집장인 아루나 바수데프가 유네스코 후원으로 개최한 국제회의였다.

8월 25일 새벽 4시 뉴델리공항에 도착하니 그 시간에도 섭씨 40도가 넘었다. 인도가 초행인 나는 마중 나온 정인준 공보관의 안내로 아고라·타지마할의 문화유적들을 본 다음 대사관저를 찾아 대학 선배인 김태지 대사를 예방했다.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대사관저는 한국 전통미를 살린 건물과 아름답고 넓은 정원이 일품이었다.

나는 개막식에 특별한 저녁행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각국 대표를 대사관저에 초청해 환영 리셉션을 여는 게 어떻겠냐고 정 대사에게 조심스럽게 여쭤봤더니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8월 27일 오전 10시 인도 외무부와 공보부 장관, 외교사절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이 격식 있고 화려하게 열렸다. 아루나의 수완이 대단함을 느꼈다.

개인 회원 29개국 65명, 11개 단체 가입

이날 저녁 한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개막리셉션은 회의 참가자들에게 한국의 건축과 정원, 국악과 음식을 소개한 뜻깊은 행사가 됐다. 나는 모든 참가자의 부러움을 샀고, 이들과 곧바로 친해질 수 있었다. 리셉션만으로도 회의에 참가한 목적을 충분히 이뤘다고 생각했다.

신승수 감독의 ‘수탉’이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 경쟁부문에 선정됐기에 나는 폐막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29일 새벽 뉴델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제작사의 도동환 사장, 신 감독, 김인문 배우, 중앙일보 이헌익 기자,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가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함께 참석했다. 아쉽게도 ‘수탉’은 본상은 받지 못하고 제작자공로상을 수상했다.

뉴델리 행사는 아시아영화진흥기구(넷팩·Netpac: The Network for the Promotion of the Asian Cinema)‘의 창립 회의였고, 나는 창설 회원이 됐다. 그 뒤 야마카타(山形·1991)·하와이(1993)·마닐라(1995) 총회를 거치며 외연을 넓혔다. 창립 회장 아루나는 25년간 넷팩을 이끌며 넷팩상을 만드는 등 아시아영화 진흥에 공헌했다. 최우수 아시아영화에 주는 넷팩상은 베를린·베니스를 비롯한 많은 영화제에서 채택했고, 부산국제영화제는 1회부터 시상하고 있다.

나는 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제5차 넷팩 총회를 부산에서 열고 아루나에게 아시아영화공로상을 수여했다. 초창기 넷팩의 핵심 멤버는 아루나와 하와이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넷 폴슨, 싱가포르영화제 집행위원장 필립 쉬아 세 사람이다.

나와 동갑인 이루나는 2001년 뉴델리에서 시네팬(Cine-fan)영화제를 창설했는데, 스폰서가 생기면서 2004년부터 이름을 오시안즈시네팬(Osian’s Cine-fan)으로 바꿨다. 나는 창설 다음 해부터 네 번을 초청받았다.

2004년 7월 인도 여배우 사바나 아즈미, 이란의 거장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영화제 감독주간 책임자 올리비에 페르, 시네마닐라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코이 아퀼루스, 그리고 나와 필립 쉬아가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다. 당시 열흘간 뉴델리에 머물며 틈틈이 곳곳을 볼 수 있었다. 아루나는 이 영화제를 그만둔 뒤 불교영화제를 운영하다 그마저 접고 지금은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고 있다.

필립은 싱가포르영화제 창설자로 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 작품 선정을 위해 매년 영화진흥공사를 방문했다. 나는 96년 제1회 부산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그에게 부탁해 오석근 사무국장과 공채 직원 한 명을 싱가포르영화제에 보내 함께 일하게 했다. 영화제 창설과 운영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아영화진흥기구(넷팩)의 핵심 멤버들. 오른쪽부터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인도 영화잡지 시네마야의 발행인 겸 편집장인 아루나 바수데프, 하와이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넷 폴슨, 넷팩 부위원장인 이란의 모하마드 아테바이. [사진 김동호]

아시아영화진흥기구(넷팩)의 핵심 멤버들. 오른쪽부터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인도 영화잡지 시네마야의 발행인 겸 편집장인 아루나 바수데프, 하와이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넷 폴슨, 넷팩 부위원장인 이란의 모하마드 아테바이. [사진 김동호]

나는 다음 해 4월 싱가포르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았다. 2000년 4월 8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6차 넷팩 총회에 참가했고, 2004년엔 넷팩상과 국제영화비평가상(FIPRESTI) 심사를 위해 다시 이 영화제에 참석했다. 필립은 매년 부산영화제는 물론 아시아 대부분의 영화제에 참석한다. 덕분에 부산과 아시아 각국에서 수시로 만나 절친이 됐다.

지넷과의 관계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90년 영화진흥공사를 방문한 그와 두 달 뒤 뉴델리 회의에서 다시 만났다. 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간 지넷은 그해 11월 하와이영화제에 나를 전 기간에 걸쳐 머물 수 있도록 특별 초청했다. 사토 다다오(佐騰忠男) 후쿠오카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화해’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그해 9월 13일 개막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공교롭게도 후쿠오카영화제와 개·폐막일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사토 위원장은 임권택 감독과 친했으며, 부인 히사코와 함께 자주 한국을 찾았다. 나와는 89년 임 감독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그 뒤 한국에 올 때마다 함께 식사하며 가까워졌다.

첫 부산영화제와 후쿠오카영화제의 일정이 같아지면서 꽤 난처한 입장이 됐다. 부산에 왔을 때 이를 알고 간 지넷이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사토와 나를 하와이에 함께 초청해 서로 만날 수 있게 주선했다. 나는 선물을 들고 하와이에 가서 점심을 사면서 그와 화해했다. 그 뒤 2006년 사토가 영화제를 떠날 때까지 10년간 부부를 부산에 초청했고, 그는 매년 나를 후쿠오카에 초대했다.

30년생인 사토는 원로평론가이자 교수였다. 91년 후쿠오카시가 ‘포커스 온 아시아 후쿠오카’영화제를 창설하면서 그를 집행위원장으로 영입했다. 15년간 영화제를 이끌다 2006년 떠났다. 사토와 나는 서로 상대 영화제를 찾으면서 더욱 친해졌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의 부인이 2019년 9월 별세한 데 이어 지난 3월 17일엔 사토마저 91세로 타계했다. 조문을 가려 해도 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넷팩’ 부회장 거쳐 지금은 고문 맡아

지넷은 사토와 나를 하와이로 불러 화해시킨 다음 해인 97년 8월 9일 결혼했다. 신랑은 파푸아뉴기니 출신의 하와이대 교수인 빌소니 헬레니코로 둘 다 재혼이다. 전문을 받은 나는 왕복 항공권을 사서 8월 8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결혼식은 ‘선라이즈 웨딩’으로 진행됐다. 호놀룰루에서 좀 떨어진 해변에서 새벽 5시에 일출에 맞춰 열렸다. 하객들은 식을 마친 뒤 그녀의 아담한 집 2층에 가서 커피와 쿠키로 요기하고 헤어졌다.

그날 저녁엔 호놀룰루 해변에 무대를 마련하고 해가 지는 오후 8시에 ‘선셋 웨딩 퍼포먼스’를 열었다. 지넷이 연출하고 빌소니가 제작한 ‘파인 댄싱’ 공연이었다. 파푸아뉴기니와 하와이의 원주민 춤과 노래로 만든 토속적이고 역동적인 공연이었다. 하와이 주지사, 호놀룰루 시장을 포함한 내빈과 주민들로 만원을 이뤘다. 공연이 끝난 뒤 인근 호텔 지하로 자리를 옮겨 밤새도록 댄스파티를 열었다.

새벽에 지넷 부부와 작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환상의 결혼식이다. 넷팩 친구 중 참석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지넷은 그 뒤 만날 때마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내가 선물한 청자를 자랑한다. 지넷은 그해 11월에 열린 하와이영화제에 나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다. 98년 하와이영화제를 떠나 남가주대학(USC) 아시아태평양미디어센터 책임자로 옮겼다. 대학 주최로 98년 3월 30일부터 사흘간 ‘인터넷을 통해 아시아영화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국제자문위원회 회의’를 열면서 나를 위원으로 위촉하고 회의에 초대했다.

넷팩은 2022년 2월 현재 개인 회원으론 29개국 65명, 기관 회원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7개국 11개 단체가 각각 가입돼 있다. 지난 2월 말 온라인 선거에서 호주 브리즈번영화제의 전 집행위원장 앤 드미게로와 인도의 비나 폴이 공동위원장이 됐다. 나는 한때 부회장을 맡았지만, 지금은 아루나와 함께 고문으로 있다.

2010년 뉴델리 넷팩 20주년 행사(8월 18~22일)와 2018년 필리핀 교수 닉 데오캄포가 마닐라에서 개최한 총회 이후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 못하고 있다. 넷팩 친구들을 반갑게 재회할 다음 총회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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