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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오프라인의 귀환]“지지직” 심장에 닿는 접속음, 빙빙 도는 LP판에 ‘물멍’ 하듯 빠져들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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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호 10면

SPECIAL REPORT 

카페 ‘상우’에 제단처럼 모셔진 오디오장. [사진 조효민]

카페 ‘상우’에 제단처럼 모셔진 오디오장. [사진 조효민]

“나는 가끔 한 시간쯤 멍하니 바닥에 앉아서 마음에 드는 레코드 재킷을 차례차례 손에 들고 바라본다. 때로는 냄새도 맡아본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평온함이 느껴지니까. (중략) 오래된 LP판에는 LP판만의 아우라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그 아우라가, 마치 소박한 온천에 몸을 담근 것처럼 내 마음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덥혀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의 한 구절이다.

1만 5000장의 레코드를 갖고 있다는 하루키는 자신의 레코드 모으기를 취미라기보다 ‘고질병’이라고 정의한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이 ‘고질병’이 대유행이다. 1931년 미국 콜럼비아사에서 개발되어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80년대 가볍고 편리한 CD가 나오면서 ‘골동품화’ 되어가던 LP가 다시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LP’하면 옛날 노래가 떠오르지만, 최근의 붐은 7080의 추억소환보다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MZ세대가 이끌고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LP 구매자 중 2030 비율이 40.8%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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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사운드트랙 LP. 북미 지역 발매된 버젼이다. [사진 조효민]

영화 ‘벌새’ 사운드트랙 LP. 북미 지역 발매된 버젼이다. [사진 조효민]

디지털 음악만 듣고 자란 MZ들이 왜 불편하고 생소한 LP 앓이를 할까. 지난해 12월 춘천에 문을 연 LP카페 ‘상우’를 찾았다. 주인장 김선영씨도 30대 ‘고질병’ 환자고, 손님도 비슷한 사람들이라서다. 춘천시 효자동의 한적한 주택가 골목, 간판도 내걸지 않은 작은 카페의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뭔가 좀 다르다. 하루키 말대로 온천물에 들어간 듯 서서히 온기가 느껴지는 소리다.

김씨는 서울 사람이지만 여행지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반해 아예 춘천에 둥지를 틀었단다.

“간판을 안 단 이유요? 이 공간이 가진 색깔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알려지고 싶어서요. 유명세 타고 북적이는 카페는 너무 많잖아요. SNS 사진 촬영만을 위해 가는 공간도 있고. 그런 쪽에서 과하지 않게, 춘천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알려지면 좋겠어요.”

누군가를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카페’라면, 좀 이상한 카페다. 턴테이블을 품은 커다란 오디오장과 스피커가 마치 제단처럼 모셔져 있고,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마치 교회의 회중석처럼 길게 그 제단을 마주 보고 있다. 여느 카페처럼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음악과 대화를 해보라는 권유 같다.

제일 먼저 턴테이블에 걸어 본 음반은 영화 ‘벌새’의 사운드트랙이다. 북미지역에서 발매된 음반을 딱 다섯 장 들여왔단다. 하얀 구름이 그려진 동그란 하늘색 음반이 빙글 돌고, 바늘이 새처럼 슬쩍 내려앉자 ‘지지직’, 음악이 시작된다. 왠지 촉감이 느껴지는 묘한 공간감에 에워싸이면서 공중에 붕 뜬 느낌이다. 기분 탓일까.

이렇게 사운드 자체로 공간감을 구현하는 앰비언트 장르가 ‘상우’의 시그니처다. 올드팝이나 밴드음악처럼 복고풍이 아니라, 소리의 물성이라는 감각을 건드리는 신문물이다. 대중적인 장르가 아닌 탓에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대부분이다. 일본 뮤지션 키하라 켄지, 하시모토 히데유키, 싱가포르 밴드 아스피디스트라플라이 등 앰비언트 아티스트에게 직접 컨택해 몇 장씩만 들여온다. 그러니 여기서 전에 들었던 음악이라도 음반이 다 팔리고 나면 다시 들을 수 없다.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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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혼자 오는 단골들이다. 주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인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온다는 게 공통점이다. 근처에 살아 자주 온다는 허세미(29)씨는 “신스팝이나 밴드 음악, 재즈 LP들은 다른 공간에서도 만나봤지만, 뉴에이지와 앰비언트를 LP로 접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면서 “LP는 가격이 비싼 편이라 트랙들을 꼼꼼하게 들어보게 된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이용권과 재생 버튼 클릭만 있으면 되는 시대에 내가 이 음악에 몰두하고 있구나, 이만한 가격을 치르길 원하는구나 느끼게 되는 게 LP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단골 안대운(24)씨도 “듣고 싶지 않은 남들의 이야기,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온다. LP판에서 나오는 음악은 휴대폰으로 트는 음악과는 다른 음질이 느껴져 집중하게 되고, 빙빙 도는 LP판을 보다보면 ‘물멍’처럼 묘하게 빠져들더라. ‘LP멍’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이들을 LP가 있는 공간으로 부르는 것 아닐까. 사운드 연구자인 한양대 음악연구소장 정경영 교수는 “지금의 LP 붐은 음악 자체를 듣겠다는 게 아니라 분위기와 향수를 듣겠다는 태도”라면서 “아무 잡음 없는 디지털에 비해 ‘지지직’ 소리는 음악이 저기 있다는 증거다. 공기의 파동일 뿐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음악이지만, LP의 잡음은 음악이 구체적으로 내 삶속 어떤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물질성과 친근감이 젊은 세대까지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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