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태어나보니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는 ‘포노사피엔스(smartphone+homo sapiens)’들에게 익숙한 세상은 디지털 코드로 구성된 언택트 세상이다. 이런 MZ세대에게 오히려 새롭고 흥미로운 건 언제라도 스위치를 누르면 끝나버리는 온라인 세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지고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실제’가 존재하는 오프라인 세상이다. ‘제품’이 아니라 ‘경험’을 팔아야 한다는 ‘경험 마케팅’ ‘공간 마케팅’이 최근 화두가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온라인 속 그 사람이 아무리 멋져도 직접 나누는 교감이 없다면 ‘그림 속 연인’일뿐 결코 내 연인이 될 수는 없다.
광고·마케팅 전문가인 이근상 케이에스아이디어(KS’IDEA) 대표는 “브랜드가 소비자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과거에는 브랜드가 TV 광고 등을 통해 ‘나를 좋아해줘’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면, 이젠 MZ세대 취향인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야 성공한다. 그런 점에서 오프라인 공간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졌다. 첫째, ‘문화콘텐트로 놀이터를 만들었으니 일단 찾아와서 나를 만나볼래?’라는 자연스러운 유도로 소비자의 자발적 방문을 끌어낼 수 있다. 둘째, 제품 판매가 목적이 아닌 비상업적인 공간은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 취향을 공감하기에 유리하다. 이렇게 맺은 관계는 끈끈한 팬덤으로 오래 이어진다. 셋째, 오프라인 공간에서 보낸 ‘인스타그래머블한’ 경험은 결국 SNS를 통해 전파된다. 즉, 오프라인 공간은 디지털적으로 공유하기에 좋은 매개체다.”
손에 잡히는 ‘3감(감각·감성·감도)’으로 MZ세대 소비문화 깊숙이 파고들어 찾아가는 즐거움을 만들어낸 ‘오프라인 공간·경험 마케팅’ 유형을 살펴봤다.
브랜드 최상위 가치와 문화 경험
지난 3월 28일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구찌 플래그십 스토어 ‘구찌 가옥’ 6층에 이탈리안 컨템포러리 레스토랑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이 오픈했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찌와 미슐랭 3스타 셰프 마시모 보투라가 협업한 곳으로 2018년 피렌체, 2020년 LA 베버리힐스, 2021년 도쿄 긴자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서울에 상륙했다.
시그니처 메뉴인 ‘에밀리아 버거’ 2만8000원, 5코스 메뉴 12만원, 7코스 메뉴 17만원. 결코 만만한 가격은 아닌데 이미 5월 15일 예약까지 꽉 찼다. 고객들이 이처럼 발 빠르게 움직인 이유는 미쉐린 3스타 셰프의 손맛보다는 구찌의 미학적 요소들로 가득한 인테리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패션 뿐 아니라 가구·식기 등 ‘구찌 데코’ 컬렉션을 갖고 있는 구찌가 자신들의 최상의 가치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꾸민 공간에서 즐기는 한 끼는 여느 레스토랑과는 분명 차별화된 경험이다.
정통 패션 하우스들이 입고 걸치는 것 외에,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도록 브랜드 아카이브를 담아 차별화된 F&B(식음료)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점차 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명품 시계 브랜드 IWC가 명동 롯데백화점 5층에 ‘빅 파일럿 바’를 열었다. IWC가 오픈한 세계 최초의 공식 커피 매장으로, 브랜드의 상징적인 제품인 ‘빅 파일럿 워치’에서 영감을 얻은 빅 테이블(10M)과 빅 스크린(6M), 무브먼트·다이얼을 연상시키는 원형 홈과 컵까지 세밀하고 정교한 워치 메이커의 면모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 놨다. 폐유리·폐비닐·폐플라스틱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고, 생분해되는 일회용품 사용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브랜드라는 점도 노출하고 있다. 시그니처 음료인 ‘스카이 오버 아프리카’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석양을 표현한 것이다.
지난해 8월 롯데 동탄점에 오픈한 A.P.C.(아페쎄) 카페 역시 오직 이곳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인테리어와 메뉴, 굿즈(티셔츠·컵·캔들·커피·보온병 등)들로 ‘기본에 충실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아페쎄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 2월 명품 시계 브랜드 브라이틀링도 ‘브라이틀링 타운하우스 한남’을 오픈하고 1층에는 부티크와 카페, 2층에는 브랜드 최초의 레스토랑 ‘브라이틀링 키친’을 선보였다. CEO 조지 컨은 “한 건물에서 브라이틀링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럭셔리에 대한 포용적이며 지속가능한 접근 방식에 대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양태오 공간 디자이너는 “카페·레스토랑 이용 비용은 명품 브랜드 제품 구매에 비해 문턱이 낮기 때문에 브랜드 입문단계로 적당하다”며 “가구, 집기, 웨이터들의 의상, 애티듀드 등을 통해 브랜드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일은 모두 미래의 소비자를 위한 전략”이라고 했다. 그는 또 “6개월에 한 번 시즌이 바뀔 때 외에는 자주 갈 일 없는 패션 숍과 달리, 카페·레스토랑은 매일도 갈 수 있는 공간이라 브랜드와 더 친숙해지는 기회가 된다”고 덧붙였다.
온라인·오프라인 투 트랙 유지
온라인 유통 공룡으로 성장한 무신사는 지난해 5월 홍대 앞에 플래그십 스토어 ‘무신사 스탠다드’를 오픈했다. 직접 옷을 입어보고 선택할 수 있는 오프라인 스토어이자, 무신사 온라인 스토어와 연계해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오픈 한 달 만에 방문객 약 8만 명을 기록했고, 올해 1~3월 누적 방문객은 약 24만 명으로 집계됐다. 픽업 서비스 이용도 2021년 10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월 평균 2300여 건에 이른다. 픽업 서비스를 통해 발생하는 매출은 전체 오프라인 매장 매출의 약 17.9%를 차지한다. 코로나19로 장기침체에 허덕이는 홍대입구 인근 상권에 비하면 엄청난 반응이다.
한편 무신사는 홍대 AK&홍대 애경타워 17층에 2644㎡ 규모의 ‘무신사 테라스’도 운영 중이다. 온라인몰에 입점한 브랜드들이 독자적인 문화·스토리를 마음껏 펼쳐 놓을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으로 쇼케이스·프리젠테이션은 물론 이벤트·전시·공연이 열린다. 무신사 인기 브랜드와 협업한 스페셜 에디션을 비롯해 LP·독립출판물 등 오직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들이 있다. 무신사는 오는 5월 무신사 스튜디오 성수점 3층 라운지에 카페와 쇼룸으로 구성된 ‘무신사 테라스 성수’도 오픈한다. 무신사 입점 브랜드들과 협업해 가변적인 형태로 ‘브랜디드 카페’를 운영할 계획이다. 브랜드·컨셉·메뉴·인테리어가 매번 바뀌는 새로운 미식경험으로 호기심 많은 MZ세대 고객과의 스킨십을 넓힌다는 게 목표다.
‘디지털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새로운 투자 방식으로 성장한 와디즈는 2020년 4월 성수동에 오프라인 공간 ‘공간 와디즈’를 마련했다. 디지털에서 급성장한 와디즈가 오프라인 공간을 연 이유에 대해 신혜성 대표는 “온라인만으로는 다 전달할 수 없는 부족감이 있다”며 “시제품을 보기 위해 일부러 팝업 매장을 찾아온 사람들의 리뷰가 정확하고 깊이가 있음을 알고 ‘협력적 소비문화’를 더 잘 만들어가기 위해 시제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상설 오프라인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다.
온라인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따로 여는 이유는 딱 하나, 디지털 세상에선 불가능한 소비자와의 직접 대면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잘 연결해서 혁신적인 경험을 설계하는 방법은 이제 모든 브랜드의 과제다. 온라인·오프라인, 어느 한 쪽만 잘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침대 브랜드 매장에 침대가 없고, 소주 브랜드 매장에 소주가 없다? 요즘 SNS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 매장들의 컨셉트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팔려고 오프라인 공간을 열었을까.
수면 전문 브랜드 시몬스가 청담동에 오픈한 사퀴테리(육가공식품) 컨셉트의 팝업 매장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청담’에서 가장 인기 제품은 5000원짜리 삼겹살 모양의 수세미다. 3000만원 대 프리미엄 침대를 파는 회사가 몇 천 원짜리 굿즈들로 가득한 ‘의외성’ 팝업 스토어를 연 이유에 대해 시몬스 브랜드전략부문 김성준 상무는 “침대는 소비주기가 길다. 평생에 침대를 몇 번이나 바꾸겠나. 때문에 지속적인 팬덤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모든 기업의 첫 번째 타깃인 MZ세대는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춘 노래방에서 음정·박자 완벽하게 노래하는 걸 좋아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코인 노래방 가서 가볍게 노래 부르는 걸 더 좋아한다. 그런만큼 힘을 빼고, 대신 그들이 선호하는 사진 찍기 좋은 공간에 집중하는 것이 팬덤 유발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품질이 생명인 프리미엄 브랜드의 자신감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만난 염현성(24) 학생은 “별 것 아닌 몇 천 원짜리 굿즈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브랜드라면, 몇 천만원대 침대에도 신뢰가 간다”고 했다.
제품은 없고 굿즈만 파는 매장
시몬스 매출은 2019년 2000억원대에서 2년 만에 올해 3000억원대로 뛰었다. 이는 업계 최단 기간 기록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매출 증가 요인을 하나만 꼽을 수는 없지만 지난 2년간 ‘하드웨어 숍’ ‘그로서리 숍’ 등의 컨셉트로 운영해온 팝업 매장이 소비자들에게 브랜드를 재발견하는 신선한 기회로 다가온 것은 확실하다. 그만큼 신뢰도와 충성도는 증가한다. 김 상무는 “제품 이전에 문화를 소비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두면 언젠가 제품 소비는 이어진다”고 했다.
소주를 팔지 않는 소주 브랜드 매장 ‘두껍상회’도 MZ세대에게 인기 많은 공간으로 손꼽힌다. 하이트진로는 2019년 1970~80년대 진로 패키지를 현대 감성으로 바꾸고, 깔끔한 맛과 낮은 도수로 주질을 바꾸고, 두꺼비 캐릭터를 리뉴얼했다. 튀어나온 배, 짧뚱한 팔다리,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외모를 가진 진로 두꺼비 캐릭터는 엉뚱함과 귀여움을 무기로 MZ세대의 호응을 얻었다. 더불어 두꺼비 캐릭터를 활용해 다양한 굿즈를 만들고 오프라인 팝업 매장을 전국에 열면서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어른들의 문방구’를 컨셉트로 하는 ‘두껍상회’는 술을 좋아하는 어른도, 술을 모르는 아이도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의 대명사가 됐고, 지난 3월 다시 부산 서면에 오픈하면서 SNS 핫플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전미영 연구원은 “매장 내에서 매출을 많이 일으키자는 목표보다 소비자가 더 많이 다녀가게 하자는 쪽으로 기업의 KPI(Key Process Indicator·핵심성과지표)가 옮겨 간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구매력이 적은 MZ세대를 타깃으로 공간·굿즈 마케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단 미래 잠재 고객이기도 하고, 현재 구매력이 가장 높은 X세대가 심리적 연계감을 갖길 원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X세대는 부모와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에 묶이기보다, 젊고 트렌드에 민감한 MZ세대와 연대감을 갖기를 원한다. 때문에 MZ세대를 마케팅 타깃으로 하면 업(UP) 효과가 일어나 정작 구매는 X세대에서 왕성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