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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마오쩌둥이 불러낸 진시황, 현대 중국의 아이콘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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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진시황이 뜨는 이유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한국인이 기억하는 중국 진시황(BC 259~BC 210)은 폭군 이미지가 강하다. 사상을 탄압한 분서갱유(焚書坑儒)나 백성을 괴롭힌 만리장성 건설 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중국에서 진시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언제부터인가 거대한 중국을 최초로 만든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 배경에는 현대 중국의 부상이 있다. 1970년대 문화혁명과 이후 개혁개방 과정을 거치며 강력한 권력을 내세운 중국의 급속한 성장이 자리 잡고 있다. 가혹한 폭군에서 위대한 황제로 부각된 진시황에 대한 인식 전환에 숨어있는 중국의 고대사 전쟁을 되짚어보자.

가혹한 폭군 이미지 점차 사라져
거대 중국 처음 건설한 영웅 대접

문화혁명서도 살아 남은 병마용
중국 공산당의 통제논리 뒷받침

법률·화폐·도량형 통일한 진시황
‘21세기판 만리장성’ 건설에 이용

‘고고학자들은 인민의 적’ 비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진시황 병마용. 20세기 중국 고고학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진시황 병마용. 20세기 중국 고고학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사람처럼 문화재에도 운이 있다. 백제의 빼어난 문물을 간직한 무령왕릉이 그렇다. 기적적으로 도굴 피해를 면했지만 정작 발굴은 단 하루 만에 졸속으로 끝났다. 반면에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은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된 문화혁명이라는 혹독한 시기에 발견됐지만 운 좋게 살아남아서 세계적인 유적으로 남게 됐다.

1966~1976년에 진행된 문화혁명은 ‘문화파괴’에 가까웠다. 이 시기에 발견된  문화재 대부분은 참혹한 피해를 보았다. 정상적인 발굴은커녕 멀쩡한 국보급 문화재도 홍위병들에 의해 무참히 훼손됐다. 심지어 황제 시신마저 부관참시(剖棺斬屍)된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예컨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 명군을 파견했던 만력제(萬曆帝·1563~1620)의 무덤인 정릉(定陵)은 1955년에 발굴됐고, 만력제와 그의 황후들의 시신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홍위병들은 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타도한다면서 만력제와 황후의 시신을 보물들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수많은 문화재가 사라졌고 고고학자들도 인민의 적이라는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파괴를 저지른 홍위병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 무법의 시절이었다.

병마용 내부. 병사들이 말을 몰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병마용 내부. 병사들이 말을 몰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진시황의 병마용은 그렇게 홍위병의 서슬이 퍼렇던 1974년 발견됐다. 진시황릉 근처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땅속에서 사람 모양의 병마용을 발견했고, 병마용을 발굴한 현지 고고학자는 행여 홍위병에게 알려질 것이 두려워 병마용을 조용히 복원해두었다. 하지만 이곳이 고향이던 신화통신사 기자를 통해 베이징에도 발굴 소식이 전해졌다.

현지 고고학자들이 자칫 큰 고초를 겪을 상황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당시 중국 정부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마오쩌둥(毛澤東)이 바로 그 직전에 공자를 비판하고 진시황을 찬양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실세이자 문화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와 같은 기존 공산당의 지도 세력을 공자에 빗대어 구세력으로 몰고 탄압했다.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4인방은 기존의 모든 것을 갈아엎고 개혁하는 상황이었으니 파괴의 아이콘인 진시황이 정책 홍보에 안성맞춤이었다.

의도야 어땠든 마오쩌둥의 글 한 줄 덕에 세계를 놀라게 한 병마용의 본격적인 발굴이 가능했다. 사실 이 지역에서 병마용의 존재는 그 이전부터 알려져 왔다. 하지만 대부분 우연한 발견으로 치부됐다. 실제로 병마용은 진시황의 무덤에서 1.6㎞나 떨어져 있었으니 진시황과 병마용을 쉽게 관련짓지 못했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대대적인 발굴을 한 후에야 진시황과의 관련성이 밝혀졌다. 문화혁명의 파괴가 낳은 유일한 성과가 진시황의 유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생전에도 도굴 두려워한 진시황

진시황

진시황

수많은 탄압으로 백성을 괴롭혔지만 결과적으로 진시황의 업적은 위대했다. 지금은 하나의 중국이 자연스럽지만 사실 진나라 이전에 중국 사람들은 한 번도 통일된 글자를 쓴 적이 없었고, 그들 사이의 방언은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라고 할 만큼 달랐다. 지금에 비유하면 유럽연합(EU)에 속한 여러 나라가 형식적인 통합을 넘어서 모든 언어와 도로규격 등을 통일한다고 할 정도의 엄청난 변화였다.

진시황이 통합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강력한 통제였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통일국가를 만들어낸 그는 모든 것을 통일시키기 위해 강력한 법률을 도입했다. 병마용이 발견될 무렵 후베이성(湖北省)의 수이후디(睡虎地)라는 지역에서 진나라의 하급 관리의 무덤도 발견됐다. 원래 초나라였던 이 지역에 파견된 진의 관리는 얼마나 엄격한 법률을 지켰는지, 그의 무덤 속에는 평생 그가 일하던 진나라의 법률과 행정문서를 적은 목간들이 빼곡히 발견됐다. 얼마나 진나라가 법을 엄히 다스리고 지켰는지 짐작이 된다. 진시황은  군사 50명을 움직이는 것도 반드시 황제의 허가를 받도록 할 만큼 중앙집권화했고, 도량과 화폐의 규격화를 통해 각 지역을 연결했다. 물론 각 지역의 반발은 강력히 억눌렀다.

중국 문화혁명 시기 문화재를 불태우는 홍위병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중국 문화혁명 시기 문화재를 불태우는 홍위병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진시황이 이룬 화려한 업적의 이면에는 불안한 한 인간의 초상이 숨겨져 있었다. 진시황의 무덤은 실제 보면 마치 야산 같은 크기다. 직경 350m에 높이가 76m이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만큼이나 그의 무덤에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자동발사 활이 장치돼 도굴을 막는다고 하고, 수은으로 만든 강이 흐른다는 등 믿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그 출전은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이 죽고 100년 뒤에 활동했던 역사가이니 실제로 진시황의 무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었는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실제로 사마천의  『사기』에는 정작 병마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병마용은 지금까지 확인된 발굴 면적만 축구장 3개 넓이인 2만㎡가 넘으니 전체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렇게 진시황의 무덤보다 더 거대한 규모를 만약 사마천이 알았다면 반드시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아마도 위대한 역사가인 사마천마저도 전혀 모를 정도로 진시황의 무덤 조성은 극비로 진행된 작업인 모양이다.

그러한 비밀스러운 작업은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서 가장 큰 무덤을 썼던 오랜 선조 진경공(秦景公)의 무덤은 도굴갱이 250개나 될 정도로 무자비하게 도굴됐다. 진시황은 이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무덤 내부 구조 등을 후세에 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대신에 수많은 이야기를 퍼뜨려 도굴을 막고, 정작 본인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비밀리에 병마용과 같은 대형공사를 했다.

화려한 권력자, 나약한 인간

중국 산해관 앞 진시황 행궁터와 그 앞에 있는 맹강녀 바위. 맹강녀는 만리장성 공사에 징발된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됐다고 한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중국 산해관 앞 진시황 행궁터와 그 앞에 있는 맹강녀 바위. 맹강녀는 만리장성 공사에 징발된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됐다고 한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진시황의 최후는 행복하지 않았다. 49세에 순행 길에서 객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거의 광적으로 지금도 쉽지 않은 엄청난 코스의 길을 다녔다. 자신이 새롭게 정복한 땅을 직접 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또한 영생을 얻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목적이었다. 그는 진나라의 동쪽 끝이었던 만리장성의 종착점 산해관에서 바다를 보며 제사를 지냈고, 실제로 그의 행궁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진시황은 바다를 보면서 서복(徐福)과 같은 방사(方士)의 헛된 이야기에 혹해서 바닷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영생을 믿기도 했다. 거대한 유적과 권력 속에 숨겨진 진시황의 모습은 어떻게든 죽음과 도굴을 피하고 싶은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발굴과정이야 어떻든 병마용은 만리장성과 함께 다시 성장하는 중국의 상징이 됐다. 1980년대 이후에 남북한 정상은 물론 중국을 찾는 수많은 해외 수뇌들이 병마용을 찾았다.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 고대사의 인물을 꺼내어 재해석하며 그를 현재의 모습에 대입하려 한다. 중국에서 진시황이라는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문화혁명이라는 소용돌이에서 탄생한 병마용은 지금 거대한 중국의 상징이 됐고, 21세기 중국은 진시황이 만든 거대한 제국에 현재의 모습을 투영한다. 구글·페이스북 등 수많은 외국의 프로그램에는 장벽을 쌓고 자신들만의 디지털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또한 강력한 왕권으로 자신들의 규격을 사방의 여러 나라에 도입시키려는 노력은 바로 진시황이 살아가던 모습이다. 하지만 고고학은 그러한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진시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