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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천천히 서둘러라 (Festina lent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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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천천히 서둘러라. 모순적인 이 경구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이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정확히 구분해 결단하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다. (김동섭, 『라틴어 문장 수업』)

탈(脫)탈원전, 4대강, 50조원 추경 등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구분을 #직진 고집하면 국민은 우회할 수밖에

출범한 지 한 달이 지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다. ‘만 나이’로의 나이 계산법 조정 등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큰 그림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인데, 글쎄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내듯 옛것을 토대로 새로움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흐름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5년마다 무슨 신장개업 하듯이 대대적으로 뜯어고치고 포장하고 선전할 일은 아니다.

새 정부가 과거 정부와 대결이라도 하듯이 호승심(好勝心)에 취해 과욕을 부리면 꼭 사달이 난다. 4대강이 그랬고, 소득주도 성장이 그랬다. 화끈한 정책을 기대하는 일부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려다 시장 혼란을 초래하고 정부 정책의 신뢰가 깨지는 것보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안전하게 건너는 편이 백번 낫다. 부동산 규제 완화와 정부조직 개편 발표를 새 정부 출범 이후로 미룬 건 잘한 선택이다.

지난 20일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tvN 캡처]

지난 20일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tvN 캡처]

선거 때 각을 세웠던 공약을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요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라고 당위만 앞세울 일도 아니다. 국회를 비롯한 정책 추진여건, 사안의 긴급성, 국민의 체감 변화 등을 냉정하게 따져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탈(脫)탈원전부터 4대강 재자연화 폐지까지 정권이 바뀌었으니 뭔가 색깔을 내고 싶지만 간단하지가 않다. 문재인 정부가 ‘대못’을 박아서라고 화풀이하고 넘어가는 건 단세포적 반응일 뿐이다. 법적·제도적 절차를 밟아야 정책은 유턴할 수 있다. ‘대못’이지만 ‘시스템’이기도 하다.

대선 공약이던 신한울 3·4호기 원전 공사를 재개하려면 에너지 기본계획과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집어넣어야 한다. 환경영향평가도 다시 받아야 한다. 2025년쯤 공사가 재개되면 상업운전은 윤석열 정부에선 힘들 거다.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 가동연장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안전성 평가와 주민 의견 수렴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인수위가 그제 원전의 가동연장 신청기간을 앞당겨 심사 과정에서 가동중단이 없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불합리한 절차는 손봐야 하지만 원전 조기 폐로를 위해 경제성 평가를 왜곡했던 문 정부처럼 과속하다 절차적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법적 절차를  밟으시라. 그러면서 미래 원전을 연구하겠다는 청년이 나오고 무너진 원전 생태계가 되살아날 수 있도록 정부가 희망의 메시지를 줬으면 좋겠다.

4대강도 마찬가지다.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에 이명박( MB)정부의 4대강 사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4대강에 건설한 16개의 보를 개방하는 문 정부의 재자연화 사업이 비효율적이라며 보 해체 폐기를 공약했다. 지난해 대통령 직속 국가물관리위원회는 금강 세종보·공주보(부분해체), 영산강 죽산보를 해체하기로 결정했지만 실제 보 해체 시기는 지역주민·지자체와 협의해야 한다. 겉으로는 보 해체지만 사실상 현상 유지(Status quo)를 선택한 고육책으로 본다. MB 4대강 계승 등의 구호를 내거는 대신, 취수구·어도(魚道) 개량 등으로 기존 보의 활용도를 높이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50조원 추경이나 대통령 관저 문제도 걱정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에 5년간 266조원이 들어간다는 데 물가와 금리는 요동치고 있다. 병사 월급 200만원, 노인 기초연금 10만원 인상, 0~12개월 아이를 키우는 부모급여 월 100만원 같은 현금성 공약도 재정 부담이 크다.

윤 당선인의 관저를 둘러싼 논란도 여전하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은 백지화하고 외교부 장관 공관을 검토 중이라는데, 어찌 됐건 당분간 당선인의 서초동 집에서 출퇴근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집무를 보지 않겠다는 당선인의 굳은 의지는 알겠는데, 왜 시민이 교통 통제로 인한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검사 윤석열을 대통령 당선인으로 만든 것은 윗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좌고우면하지 않았던 윤 검사의 ‘직진 본능’이었다. 50조 추경이나 관저 이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직진 본능’은 여전한 것 같다. “50조 추경, 경제여건이 달라졌으니 현실적으로 수정하겠습니다.” “이번만은 청와대 꼭 떠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당분간 힘들겠습니다. 국민 불편하시게 할 수는 없지요.” 이런 유연함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대통령이 직진만 고집하면 국민이 우회할 수밖에 없다.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